연필에 대하여
연필에 대하여
  • 승인 2020.06.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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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는다 연필깎이 입구에 깊숙이 들이밀고 빙빙 돌린다 어디에 뿌리를 남겨둔 나무였을까 흩어지는 살들의 성체 안에 굳은 심이 보인다 검게 빛나는 질감이 마치 역사 같다 뼈와 살을 여미지 않고 세상을 건넌 사람들은 모른다 깊고 곧은 마음 품을 수 없다

적당히 눈감고 살아온 생을 연필깎이에 넣어 빙빙 돌린다 톱날은 신이 나 죄의 비늘을 쳐낸다 물관부의 투명으로 눈뜨고 싶다 뾰족하게 깎은 영혼으로 생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 연필이 깎인다 뾰족한 심이 일어나 세상의 허를 찌르는 광휘를 엿본다

◇전다형=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제12회 부산작가상 수상, 현재 평생교육원과 도서관, 문화센터 등 <치유적 시 창작> 강의. 시집으로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와 연구저서「한하운 시의 고통 연구」가 있음.

<해설> 인간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근본 이유는 ‘나’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허상이고 느낌은 자기 환상에 불과함에도, 우리는 마음을 방치하여 좋거나 나쁘거나,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것들에 사로잡힌다. 세상에 휩쓸려 번다한 인연과 사무에 몸을 맡기다보면 자신이 애당초 원했던 것, 자신이 진심으로 추구했던 것,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가면 속에 숨긴 채 맡겨진 배역, 완벽한 타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마침내는 그 배역이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역에 충실하느라 얼마나 많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아니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인간은 문득문득 자신에게 그것들이 다 허깨비였노라고 할(喝)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현묘함이란 무슨 신비하고 고원한 경지가 아니라 배역을 맡기 전의 자기의 참모습, 즉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갈구하는지 솔직해지는 자신의 본래자리이다. 그 자리를 거짓 없이 마주하고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이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최고 우선순위를 가져야 할 것이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한 깨어있음은 지혜의 분별력을 지녀, 세상을 관조하며 나날이 싱그럽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다. 어쩔 수 없는 힘듦이 찾아와도 두려워는 하지만, 변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스스로가 자신을 끝까지 믿어줄 수 있다. 깨어있음은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날개를 접는 것이 순리임을 안다. 인생은 자신이 주도권을 쥘 때야 비로소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세월은 어느 순간도 날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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