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태기
관태기
  • 승인 2020.06.2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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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SQ힉스아카데미 대표, 경영학 박사
폭넓은 인맥으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피로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관태기’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관태기는 ‘관계의 권태기’라는 의미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권태를 느끼거나 지나치게 많은 인맥으로 피곤을 느끼는 현상이라고 한다.

‘와, 폰에 저장된 번호가 정말 많군요’ 휴대폰 기종을 바꾸기 위해 폰 번호를 옮기던 직원이 조금 감탄하며 내 얼굴을 쳐다본다. 살짝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끊임없이 전달되는 안부 문자와 전달사항 그리고 모임에 대한 정보를 읽어야 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혼밥’이란 신조어가 생기기 전에 가끔 혼자서 식사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식사하러 왔는데 가능한가?’라고 먼저 물어 보아야 한다. ‘가능하다’고 하면 좀 미안한 마음으로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천천히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차를 한 잔하며 한참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쉬곤 했다.

그렇게 가끔 들렀더니 서로 아는 사이가 되어, 갈 때마다 정중한 눈인사와 함께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받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 홀로 찾아 간 나를 정중하게 맞아 준 그 레스토랑이 고마움으로 마음속에 남아있다.

조용히 혼자 있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의 관태기 극복 방법이다. 관태기가 더 깊어지면 레스토랑 대신 잘 아는 피정의 집을 찾는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은 피정의 집은 그 특유한 분위기로 침묵을 요구한다. 그 침묵이 싫지 않은 것은 내 안의 피로감 때문일 것이다. 그 곳에서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낸다. 식사도 조용히 혼자 할 수 있어서 좋다. 혼자 책을 볼 수 있는 작은 도서관,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기도실, 혼자 산책할 수 있는 묵상 길, 피정의 집에는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한 흔적이 많다. 수녀님들의 조용한 관심, 약간의 미소 그리고 물 한잔의 대접은 내 마음에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동력이 된다.

벨 소리가 나서 전화를 받으니 요즘 몹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지인의 목소리이다. 혹시 내일 한 나절 정도, 시간을 좀 내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다. ‘물론 가능하다. 마침 시간이 비어있다’고 말해 두고 일정을 조정해 그를 만났다. 몸이 불편한 그가 내 도움이 좀 필요했던 모양이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며 내 손을 잡는데 고마운 것은 오히려 나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피곤했었는데, 그를 만남으로 피곤이 씻어지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정말 좋다. 빨리 회복해 함께 밥도 먹자’며 그를 위로했다. 관태기로 인한 피로감이 사라지고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 마치 연애를 하고 온 아들이 보고하듯이 오늘 하루 만남을 아내에게 털어 놓는다. 한 나절 가량 에 있었던 일을 마치 일주일 정도 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내에게 그가 어려운 가운데 얼마나 잘 버텨내고 있는지 얼마나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는지 전해 주었다. 그를 이야기하는데 내게 힘이 났다. 아내도 눈물을 글썽인다.

점심을 먹고 돌아 왔더니 책상 위에 꽃이 한 다발 놓여 있다. 웬 꽃인가 물었더니 내가 생각나서 누군가가 보낸 꽃이라 한다. 기념일도 아닌데 꽃을 받는 것이 어색했지만 그럼에도 꽃은 너무도 예뻤다. 꽃다발을 풀어 꽃병에 꽂으며 향기를 맡아 본다. 아침에 뿌리고 나온 향수는 몸의 냄새를 감추어 주었지만 이 꽃향기는 관태기의 피로를 풀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피곤하다. 그래서 가끔은 홀로 있고 싶다. 홀로 있는 공간은 수도원이 아니라 피정의 집 정도가 적당하다. 홀로 있는 시간은 너무 장기적이기 보다는 1박2일 정도가 좋겠다. 아픈 지인이 전화가 오면 달려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생각하여 보내온 꽃의 향기는 맡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듯 관태기가 사라진 듯 몸 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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