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현대적 변주…‘드러남과 숨김’을 사유하다
한국화 현대적 변주…‘드러남과 숨김’을 사유하다
  • 황인옥
  • 승인 2020.07.12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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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예술회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 ‘김봉천’
먹·파라핀·한지로 프로타주한 탁본 형식 한국화 ‘파혼’
발·창호 이용해 흔들리는 풍경 상상하게끔 만든 ‘정-동’
종이 위에 먹 여러 번 올린 후 칼로 군데군데 뜯은 ‘은-현’
재료·작업방식 변화 꾀하되 ‘균형’이란 가치 30년간 견지
김봉천은현-1
김봉천 작 ‘은-현(隱-現)’
 
김봉천작가
'드러남과 숨김'을 주제로 한국화의 현대적인 변용을 모색하고 있는 김봉천이 대구문화예술회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에 초대됐다. 작가가 전시장에 걸린 그의 작품 '은-현' 시리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은 숨기고 서양은 드러냈다. 사랑에 대한 표현도 동양은 드러내기보다 간직하는 쪽이었고, 서양은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표현에 적극적이었다. 패션은 어떤가? 서양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지만, 동양은 암묵적인 저지선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표현하는 것과 표현하지 않는 것’, ‘숨김과 드러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숨김’의 심리 속에 ‘세속적인 단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온전히 간직하고 싶은 완고함이 있지 않았을까?’

작가 김봉천(사진)의 예술 미학은 ‘드러남’과 ‘숨김’의 팽팽한 줄다리기다. 이 둘의 조화로 균형감있는 세상을 염원한다. 그에게 ‘드러남’과 ‘숨김’은 가시적인 세계와 관념이라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작가가 “동양화에서는 예로부터 여백을 중시했다. 나타내지 않더라도 사유와 명상의 공간으로 표현하는 정신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감춰진 해와 달과 바람의 작용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담아내고 싶었어요.”

영남대 사범대 회화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드러남과 숨김’을 주제로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을 모색했다. 특히 그의 작업을 언급할 때 물성이나 작업 기법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변화무쌍함의 역사를 구축해 온 서양화와 달리 일정한 틀을 고수해온 전통한국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만큼 그의 작업이 혁신적이라는 것.

그 첫 작업이 ‘파흔’ 시리즈였다. 이때는 새로운 재료의 모색을 통해 변화의 의지를 드러났다. 한국화의 전통 재료인 한지와 먹에 파라핀이라는 새로운 물성을 도입하며 탁본 형식의 한국화를 시도했다.

“당시 한지 앞면은 파라핀으로 탁본하듯 찍고, 뒷면에서 칠하는 배채기법을 활용해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어요.”

일명 프로타주(Frottage) 기법의 도입이었는데, 물감이 스며들지 않는 파라핀의 물성을 이용했다. 앞면은 가로 줄로 집적하고, 뒷면에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경우 앞면에 파라핀으로 칠한 가로줄에는 먹이 스며들지 않았다. 드러남’과 ‘숨김’의 완벽한 균형이자, 현대판화기법이 만든 전통 수묵화의 새로운 질주였다.

“반은 숨기고 반은 드러낸 까닭에 오히려 완전히 드러난 형상보다 상상의 여지는 더 많아졌다고 할 수 있죠.”

두 번째 화풍인 ‘정(靜)-동(動)’ 시리즈는 10년 만의 변화였다. 우연히 식당 벽에 걸린 ‘난외무풍죽유성(欄外無風竹有聲·난간 밖에는 바람이 없는데 대나무가 서걱거리고). 정전유월송무영(庭前有月松無影·정원에 달은 있는데 소나무의 그림자는 없네)’라는 선문답 같은 글귀를 보고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 10대 때 지은 시의 일부인데, 김봉천은 이 글귀에서 착안해 ‘고요함 속의 움직임’(靜中動)을 형상으로 구현했다.

‘파흔’ 시리즈에서 재료와 기법에 집중했다면 ‘정-동’ 시리즈에서는 전통한국화의 핵심인 정신으로 돌아왔다. 핵심 형상 몇 개로 깊고 넓은 관념의 세계를 넘치도록 표현하는 한국화의 절정의 지성을 이수광의 글귀를 통해 새삼 인식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물성에 집중했던 태도에 정(靜)과 동(動) 속에 담긴 관념성의 표현도 심화해 갔다.

“눈(雪)이 와서 달그림자를 흡수했던 것이고, 바람이 아닌 쌓인 눈이 떨어져서 대나무 가지가 흔들렸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눈이라는 고요한 존재가 대나무의 움직임 속에 있었던 것이죠. 정과 동의 상태를 눈과 대나무라는 대상에 담아내려 했어요.”

‘정(靜)-동(動)’ 시리즈에는 몇 가지 장치들이 새롭게 추가된다. 일단 형상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전 작업의 핵심 형상이었던 ‘전통문양’ 대신 달빛에 비치는 밤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파라핀으로 그린 가로선 대신 창호나 발(簾)이라는 은유적인 장치를 활용해 감성의 물을 한껏 올렸다. 초기에 사용하던 파라핀도 후기로 넘어오면서 먹으로 변주를 거듭했다.

“발(簾)을 통해 바라본 ‘고요함 속의 움직이는 풍경’은 안개 속 풍경처럼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어요.”

세 번째 변화는 ‘은(隱)-현(顯)’ 시리즈. 2013년 개인전에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지난 9일 개막한 대구문화예술회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에도 ‘은-현’ 시리즈가 나왔다. 이번 전시에는 물에 비친 풍경이나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을 그린 200x720㎝ 등의 대형 작품 10여점을 걸었다. 모두 먹으로만 완성한 작품들. 물속에 투사된 나무의 일렁임과 발을 통해 투영된 대숲의 서걱거림에서 잔잔한 떨림이 전해진다.

“먹은 모든 색을 담고 있기도 하고, 아득히 먼 우주의 색이기도 합니다. 저는 먹을 통해 표피적인 것보다 그 내면까지 들여다보고자 했어요.”

‘은-현’ 시리즈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기법이 등장한다. 일명 ‘뜯어내기’ 기법.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실루엣만 남겨 작업하고 확대하여 먹을 여러 차례 올린 사합장지에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예리한 칼로 뜯어내는 방식이다. 먹이 숨고 드러나기를 반복한 화폭에는 비밀의 정원처럼 신비한 달빛 세상이 가득 펼쳐진다.

‘뜯어내기’ 기법을 활용한 ‘은-현’ 시리즈는 돌을 깨어내 형상을 드러내는 조각 기법을 떠올려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형태의 결을 결정하는 먹의 농담 조절은 네 겹의 장지 중 몇 겹을 뜯어내느냐로 결정된다. “그리기의 일반적인 방식은 물감을 쌓아올리는 것이지만 저는 역으로 쌓아올린 먹을 뜯어서 숨겨진 부분들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어요. 미켈란젤로가 말한 ‘나의 조각은 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한 이치와 같은 맥락이죠.”

전시된 작품들 중에는 ‘현실 속 달빛 풍경’을 의심하게 하는 리얼한 작품도 있다. 은은한 빛이 풍경에 숨을 불어넣은 결과다. 정지된 화면이지만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오는데, 이는 조명의 효과다. 그가 “빛이 투과되는 한지의 특성에 착안해 그림 뒷면에 조명을 넣었다”고 귀띔했다.

‘은(隱)-현(顯)’ 시리즈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먹만으로 표현하는 버전과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끌어들이는 버전이다. “색에 대한 갈증이 정점을 달릴 때 주저 없이 색을 사용한 결과”다.

아크릴 물감을 흡수하지 못하는 장지의 특성상 색 작업은 두꺼운 ‘하드보드지’를 사용한다. 이때 관건은 ‘어떤 방식으로 숨기고 드러낼 것인가’다. 하지만 그는 노련했다. “색에 색을 올리고, 색을 살리고 싶은 부분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숨김과 드러냄을 해결했어요.”

지난 30여년간 ‘드러남과 숨김의 철학’은 변함없이 견지했다. 하지만 표현방식에서는 4번의 변화를 거쳤다. 작가는 이같은 변화에 대해 “작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라고 답했다.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지는 않았어요. 작업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새로운 방식이 나오기도 하고, 실수가 새로운 작업으로 연결되기도 했죠.”

그가 플러스 알파(+α)의 힘을 언급했다. 의도치 않은 우연성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가 “작업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몰입의 순간을 경험할 때 +α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도공이 마지막 과정을 불에 맡기듯 작업과정에서도 때로는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깨지게 되죠. 그런 과정 속에서 계획에 없던 새로운 결과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30년 화업에서 그가 그림으로 추구한 가치는 ‘균형 감각’. ‘정-동’이나 ‘은-현’ 시리즈에서 그는 항상 그 중간인 ‘이음표(-)’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중간자의 위치에서 양단을 취합하고자 노렸했어요.”

그가 조선시대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의 “네 말도 맞다, 자네 말도 맞다”라고 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음표 속에 투영한 작가정신을 에둘러 설명했다. 말인즉슨 중도(中道)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상을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혹자는 지조없는 회색분자라고 할 수 도 있지만 저는 균형감각이자 지혜라고 말하고 싶어요.” 김봉천과 김영환, 김윤종, 윤종주, 이상헌 등이 함께하는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은 8월 15일까지. 문의 053-606-613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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