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 집집이 주렁주렁 감나무, 다 이유 있었네
고향마을 집집이 주렁주렁 감나무, 다 이유 있었네
  • 채영택
  • 승인 2020.07.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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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숲 그리고 자연이야기 - (28) 양반나무 서민나무
서민나무, 생활과 직결
감나무·밤나무 등 주로 유실수
감, 추수 뒤 먹는 소중한 음식
말려서 제사상 위에 올리거나
겨우내 먹는 주전부리 등 활용
양반나무, 심신 수양 목적
소나무·단풍나무·매화나무 등
사색·글쓰기 소재로 주로 사용
장원급제 어사화에 꽂은 능소화
감나무1
평민들의 집에는 대체로 고욤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등 유실수를 많이 심었다. 사진은 감나무.

“양반은 트림하고 상놈은 방귀 뀐다” 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 양반과 달리 쌀이 부족했던 평민들은 주식으로 보리밥과 잡곡만 먹고 소화가 안되어 방귀가 잦았던 가난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보리는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오곡지장(五穀之長)이라 불렀다. 쌀, 현미, 콩 등 오곡 가운데 최고라는 말인데 식이섬유가 매우 풍부한 보리는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에서도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건강을 위해 찾아서 먹기도 하는 것이 보리밥이다.

아무튼 양반제도는 평민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제도였고, 보릿고개라는 서럽고 힘겨운 언덕을 넘어야 했던 것도 유교적 사상의 바탕위에 성립된 철저한 위계 사회적 실상의 결과였다. 이러한 양반제도는 원래 고려시대에 생겨났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착을 한 관료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당시 계급인 사·농·공·상 중 사(士)에 해당하는 층은 사림이나 귀족, 문·무관 등으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며 지주계급으로 관직을 두루 거쳐 관료가 될 수 있는 조선시대 특유의 지배계층이었다. 반면 평민은 농민과 공장 그리고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피지배 계층으로 이들 평민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양반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한 글 공부나 활쏘기 등 유교적 도덕과 품성을 갖추기 위해 힘쓴 반면, 평민들은 양반이 가지고 있는 토지에 농사를 직접 짓는 소작농으로 국가에 세금을 바치며 노역과 군역으로 나라를 유지하는데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이들이 사는 가옥의 구조도 달랐는데 양반집의 구조를 보면 재력과 권력이 있는 양반과 그렇지 못한 양반의 가옥의 형태는 규모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아흔 아홉 칸으로 지어졌던 정읍의 김동수 가옥, 청송 심호택 가옥, 남창동 주택, 강릉 선교장, 안동의 임청각 등에서부터 사랑채, 행랑채, 안채, 사당으로만 지어진 단촐한 양반집까지 다양했다. 반면 평민들의 집은 간혹 사랑채나 곳간 등이 있어 좀 더 넓은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 초가집으로 지어져 방 세칸이 전부였다.

오늘날 아직도 우리의 내면과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배금주의로 변질된 양반제도의 폐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과 평민의 삶의 일부였던 주거지에는 어떠한 꽃과 나무들이 심겨져 그들의 일상과 함께 했는지, 양반들의 유유자적한 삶과 평민의 곤고(困苦)했던 삶을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반추해 보고자 한다.

평민들의 집에는 대체로 고욤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등 유실수를 많이 심었다. 이들의 문제는 언제나 먹을거리와 관련이 있었는데 쌀밥만 먹는 것이 평생의 소원으로 여길 정도로 늘 배고팠던 시절의 대용식으로 감과 밤 대추 고욤은 추수가 끝나고 겨우내 먹을 수 있는 소중한 구황음식이었다.

고려때 계림유사나 향약구급방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는 감나무는 먼저 익은 홍시는 정성스럽게 따서 모아 두었다가 겨우내 주전부리로 먹었다. 단단한 감은 곶감으로 말렸다가 제사상에 올리거나 간식거리 삼아 지난한 겨울밤을 도란도란 지내다 보면 어느덧 봄농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가난하고 소박했지만 감나무에 붙은 마지막 가장 큰 감은 늘 남겨두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즉 마지막 하나는 까치나 새가 먹고 그 속에 있는 씨앗이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도록 자연의 순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또한 감나무의 노란 꽃은 오뉴월이면 떨어지는데 동네 처녀 아낙네 할 것 없이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것은 목걸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꽃 만큼의 아들을 낳아 달라는 주술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렇듯 평민들에게 감이 제수용이나 주식의 대용 혹은 주술적 의미로 쓰인 반면, 양반집 감나무는 언제나 사색과 글쓰기의 소재가 되었고 감나무의 오덕(五德)도 선비 정신의 예와 덕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오덕이란 감나무의 잎이 넓어 글을 쓸 수 있으니 문(文)이오, 단단한 가지는 화살대로 사용했으니 무(武)요, 겉과 속의 색깔이 같으니 충(忠)이오, 홍시는 이빨 없는 노인도 먹을 수 있으니 효(孝)요, 감은 서리가 내려도 떨어지지 않으니 절(節)이라 했다. 이렇듯 감을 바라보는 시각은 양반과 평민은 큰 차이가 있었다.

평민들의 집에는 밤나무도 많이 심었는데 밤꽃이 피는 오월이면 그 해 모내기는 시작되고 밤꽃이 떨어지는 유월이면 얼추 모내기는 끝이 났다. 추석 전 밤알이 탐스럽게 익을 무렵 밤톨을 먼저 주으러 아이들은 이른 아침이면 메뚜기처럼 이불을 걷어차고 뛰어 나가기도 했다. 잘 익은 밤은 조상의 제사상에 올렸는데 한 송이에 밤알이 세 개인 것을 상품으로 쳤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지칭했던 세 톨의 밤은 제상의 맨 앞줄에 놓였다(홍동백서의 원리로 첫 번째 대추와 두 번째 밤이 놓였다). 하지만 밤꽃이 필 무렵 비가 많이 오거나 기후가 좋지 못하면 밤나무혹벌의 침입을 받기도 하는데 혹벌의 침입으로 밤 한톨도 수확하지 못할 때는 조상의 제상에 햇밤을 올리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괜히 죄스러워지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못했던 평민들은 마을 뒷산에 봄이면 진달래(참꽃)와 여름이면 머루, 다래, 산딸기, 개암열매, 보리밥나무열매 등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쌀밥을 잘 구경하지 못해도 그리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춘삼월 나무에 물이 막 오를즈음 아버지는 노을녁에 지게에 한 짐 가득 싸릿단을 해가지고 들어오시고 나뭇단 한 켠에는 참꽃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날은 입술이 벌개지도록 참꽃을 따 먹는 날이었다.

사월이면 피어나는 조팝나무, 유월이면 배고픔에 기다린 하얀 쌀밥과 같은 이팝나무 꽃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쌀이 모자란 평민들은 잡곡을 많이 심었는데 잡곡은 주식이 되지 못해 그냥 벼나 보리를 심지 못하는 빈 땅이나 두둑에 간작으로 심었다. 그래서 그냥 잡곡이라 했다. 옥수수, 수수, 기장, 콩, 팥, 참깨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잡곡은 오히려 국민들의 건강식품으로 불리며 일부러 찾아 먹는 실정이 되었다.

이맘때쯤 만산을 뒤덮고 있는 참나무에는 도토리라는 열매가 달리는데 ‘도토리 풍년에 벼농사 흉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민들의 구황음식이었던 도토리는 꽃이 필 무렵 비가 오지 않으면 도토리는 많이 달리고 벼농사는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므로 도토리로 묵을 해서 허기를 달랬던 것이다. 참나무 역시 평민들의 구황나무지만 조선 선조 임금이 피란시절 수라상에 올린 음식이라서 상수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실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가장 낮은 땅에서 많이 열리고 묵맛도 제일 좋다.

흔히 양반나무라고 하면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남천 등 추위에 약해 봄에 새순이 늦게 나오는 나무를 일컬어 하는 말한다. 우리나라 양반고택과 전통정원에 심은 나무를 보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소나무가 가장 많고 매화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배롱나무, 능소화, 산수유, 향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철쭉, 쉬나무 등이 주를 이룬다.

선비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소나무는 물론 고고한 향이 일품이었던 매화나무 역시 양반들의 전리품처럼 여겨져 전국에 유명한 매화의 명소가 아직도 그윽한 향을 발하고 있다. 산청 단속사의 정당매, 도산서원 경내 매화, 지리산 시천면 남명 조식이 심은 매화, 산청면 남사리의 남영국씨댁 고매, 창덕궁 보춘정의 홍매, 부여 백강마을의 동매, 선암사의 고매, 섬진마을의 청매실농원, 팔공산 송광매원, 운림산방의 일지매 등 특히 퇴계 이황은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에서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고 돌았던고 /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라고 읊을 정도로 매화를 사랑했다.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 역시 꽃을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어 많이 심었다. 능소화는 옛날 문과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의 어사화에 능소화를 꽂았기 때문에 양반꽃이라하여 평민이 능소화를 심으면 양반 모욕죄로 곤장을 맞기도 했다. 또 양반이 이사갈 때 꼭 챙겨가는 나무가 쉬나무와 회화나무 열매라 했다. 쉬나무는 공부를 하기위해 씨를 짠 기름이 필요하였고, 회화나무는 학자목으로 선비의 절개를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평민들은 같은 나무라도 생활과 직결되어 있었으며 양반은 심신의 수양과 나무가 가지고 있는 선비의 기질을 닮으려 했다. 하지만 양반나무든 서민나무든 나무는 자신만의 고유한 품성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요즘 돈이 양반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오로지 물질과 얕음을 따르고 깊음을 배척하는 현대는 덕이 없고 부박(浮薄)한 세상처럼 보인다.

나무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본성을 되찾을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나무를 보고 오덕을 헤아린 선비의 혜안은 자연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부박하고 변해버린 인간의 천한 본성을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감나무뿐이랴. 밤나무, 오동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의 오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화소록에서 강희안(1417~1464)은 “꽃을 기르는 일은 관물찰리(觀物察理)의 공부다. 사물에 깃들어 이치를 살피는 것이 선비의 공부법인지라 화훼를 기르면서 그 이치를 살피고 이로써 마음을 수양한다.” 는 말은 이 시대에 우리가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 볼 경구가 아닐까.

 

 

임종택<나무치료사·대구한의대 환경조경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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