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유언장
아쉬운 유언장
  • 승인 2020.07.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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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SQ힉스아카데미 대표 경영학 박사
지난주, 마음속으로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셨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이다. 한 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죽음, 또 한 분은 충분히 예측된 죽음이었지만 두 분을 함께 잃은 우리들의 상실감과 아쉬움은 크다. 두 분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력은 장례식장의 조문행렬이 보여주듯 크고 깊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죽음을 두고 문상 기간 중에 벌이는 여야 간의 공방이나 진보 측과 보수 측의 대립에 무척 마음이 아프다.

세 번이나 서울시장에 선출된 박원순 시장의 행정력은 충분히 입증된 것이다. 인권변호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무척 크다. 그의 리더십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주목할 만큼 매우 신선하였다. 백선엽 장군의 업적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지대하다. 특히 6·25 전사에 길이 남을 다부동 전투는 세계 전사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하다. 아마 ‘박원순을 대신할 서울시장은 있지만, 백선엽을 대신할 장군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분은 최근의 고소와 관련된 행적으로 보수 측의 비판을 받고 있고, 또 한 분은 과거의 친일 행각으로 진보 측의 비판을 받고 있다. 3선의 서울시장이 반대 진영에서는 잡범처럼 여겨지고, 국가를 지켜 낸 영웅도 상대 진영에서는 매국노로 보일 뿐이다. 양 진영의 대립은 죽음의 위중 앞에서도 절제를 잃은 듯 혼란스럽다. 진영대결이라는 우리 사회의 깊은 골은 두 분의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심란한 마음으로 새벽에 잠이 깨었다. 일어나 창문을 여니 아직까지 어두운 새벽인데, 제법 굵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보물을 잃은 듯, 두 분의 죽음으로 아직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의 아픔보다 더한 것은 두 분의 죽음이 남긴 아쉬움이다. 두 분의 죽음에는 아픔과 함께 깊은 아쉬움이 있다.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몇 몇 분들의 유언이 생각이 났다. 먼저는 채명신 장군의 유언이었다. 베트남 전의 영웅이자 초대 월남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나를 파월장병이 묻혀있는 사병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국방부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는 자신의 유언대로 파월장병과 함께 묻혀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과 종교 개혁자였던 칼뱅의 유언도 생각이 났다. 워싱턴은 생전에 그의 유해를 가족 묘지에 안장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생전에 개인 영지에 미리 만들어 놓았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제네바의 구시가지 남쪽, 저명한 인물들의 공동묘지에 칼뱅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묘가 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묘비조차 없는 평범한 묘 앞에는 그의 이름 아래로 서너 줄의 설명을 덧붙인 작은 동판이 놓여 있을 뿐이다.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갑자기 이 분들의 유언이 생각난 것은 두 분의 죽음이 남긴 아쉬움 때문이다. 만약 박원순 시장의 유서에 고소인에게 대한 최소한의 사과가 있었더라면, 또 자신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더라면 그의 죽음으로 인한 아쉬움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만일 백선엽 장군이 자신의 친일 행적이나 장지에 대한 유언을 남겼더라면 그의 죽음은 훨씬 품격이 있었을 것이다.

장례식이나 장지는 작은 것이 오히려 울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남기는 마지막 유언은 좀 더 크고 분명하면 좋겠다. 채명신 장군과 조지 워싱턴 그리고 칼뱅의 유언은 크고 분명하다. 그래서 두 분의 죽음에는 슬프고 아픈 마음과 함께 아쉬움이 함께 남는다.

진영논리에 갇힌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분의 죽음이라도 온 국민의 애도를 받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유언’일 수 있다. 죽음과 역사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남기는 ‘유언’은 온 국민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 그래서 유언은 더욱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유언’으로 위로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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