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공간에 움튼 생동감…풍경이 흐른다
텅 빈 공간에 움튼 생동감…풍경이 흐른다
  • 황인옥
  • 승인 2020.07.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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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 펄 ‘신기운’展
통념화 시선 탈피·의식 확장
정지된 공간에 시간성 부여해
빛·바람 등 더해 장시간 촬영
재즈피아니스트 고희안 참여
영상물과 즉석 연주 ‘콜라보’
신기수작-잠수교영상스틸컷
신기수 作 ‘잠수교’ 영상 스틸컷.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공기를 느낄 때가 있다. 일상을 깨트리는 매염제가 공간에 개입되는 찰나의 변화된 공기다. 작가 신기운이 처음 경험을 한 것은 오래전 참여했던 해외 어느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약속된 프로그램 일정이 마무리 되면서 상주하던 공간에서 짐을 빼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는 순간, 공간에서 낯선 적막감을 발견했다. 몇 달간 한 몸처럼 함께했던 공간이 낯선 공간으로 다가오면서 ‘낯선 공기의 실체’를 찾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카메라를 설치하고, 노출 고정으로 24시간을 빈 공간을 촬영했다.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그가 “내가 사라져도 공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과 미세한 바람의 변화에 따라 공간 속 풍경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표정을 달리했다”며 당시 놀라워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하루 동안 촬영했는데 제가 떠났는데도 공간은 그대로 였어요. 그런 공간을 보면 내게 충만을 주었던 것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깨닫게 됐죠.”

작가 신기운 개인전이 아트스페이스 펄에서 26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에는 서울에서 영한 영상 3점과 대구경북에서 촬영한 영상 3점 등이 걸렸다. 서울의 광화문, 잠수교, 정릉에서 2~3일간 카메라 노출로 촬영한 풍경과 대구의 스타디움, 입주 직전의 아파트, 경산의 소나무 숲과 레지던시 프로그램 종료 후 촬영한 영상 작품 등이다.

특정 공간의 풍경을 촬영했다는 점에서 이설없는 풍경화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을 담아낸 한 컷의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작가의 풍경 속에 담긴 시간성이 이질적이다. 특정 공간을 적게는 하루, 많게는 며칠씩 촬영한 영상이기 때문. 굳이 명명하자면 ‘흐르는 풍경화’ 정도에서 타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지된 풍경에 시간과 빛과 바람 등의 상황들이 개입되면서 살아 숨 쉬는 풍경화가 된 것. 이는 통념화 된 ‘풍경화’에 대한 반란이다.

작가가 “빈 공간을 시간을 부여해 촬영해 놓고 보니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한 조금은 달라진 풍경화를 “제한적인 시각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풀이했다. “시간성을 배제하고 보면 공간은 정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시간성을 부여하고 보면 빛과 같은 공간에 개입되는 소요들이 만드는 변화무쌍함이 분명히 존재하죠. 공간의 확장이자, 풍경화의 확장이자, 의식의 확장이죠”

이번 전시를 위해 대구의 사람으로 북적돼야 할 특정 장소들도 촬영했다. 영상 속에는 코로나 19로 텅 비어버린 장소들이 시간성을 두고 담겨졌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적으로 호흡하고 누리던 장소들의 출입이 제한되고, 그로 인해 공간이 휑하게 비면서 평소에 깨닫지 못했던 장소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게 되는 현 상황이 영상에 지배적인 정서로 담겼다.

그가 “사라지거나 제약을 받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는 제 작업의 주제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19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며 “대구에서는 코로나 19로 새삼 깨닫게 되는 공간의 가치를 담아냈다”고 했다.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때는 가족을 잃었을 때이며, 우리가 그렇게 손에서 놓지 못하는 휴대폰도 휴대폰이 내 손에서 사라진 시점인 것 같아요.”

이번 전시는 영상과 즉석 연주의 콜라보도 눈길을 끈다. 신기운의 영상작업을 보고 피아니스트 고희안이 즉석 연주를 펼치며 ‘영상과 연주’가 상호작용하고, 그의 연주는 이후 작가의 영상 작업에 입혀진다. 지난 7일 즉석연주회가 소수의 관람자와 유투브(아트펄tv)로 실시간 송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고희안은 직관적인 감정 충실에 익숙한 재즈피아니스트다.

고희안은 이날 연주에 앞서 영상을 보고 진행하는 즉석 연주 형식에 대해 “더하거나 고침이 없는 즉흥 연주는 오히려 자신에게 솔직한 연주형식”이라며 “정답과 오답을 가리고, 틀리지 않아야 완벽이라고 생각하는 생각들에 대해 또 다른 방향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에는 영상만으로 구성했지만 사실 작가는 조각을 전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치나 조각, 평면 등 장르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다양한 작업들을 선보여왔다. 평면 작업의 대표작은 설계도를 그린 작품이다. “공간이나 물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크기인지를 정밀하게 알려주는 정보죠. 이런 점에서 설계도는 또 다른 정물화로 다가왔어요.” 평면으로 그린 설계도는 3D프린트로 조각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평면이나 영상이나 조각에서 공통분모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성이다. 공간에 시간을 끌어들여 시공간을 확장한다. 무엇을 담아내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작가가 “욕망”을 언급했다. 작가는 욕망을 시각화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이 압축적으로 담긴 아톰, 아이팟, 동전같은 물건들을 갈아서 가루로 내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욕망이 단적으로 투사된 물건들을 갈면서까지 보여주고 싶었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었다. 이는 이번 전시 제목 ‘무에서, 그 무엇으로, 그 모든 것으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모든 존재는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053-651-695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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