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은 이루어짐이 늦다(大器晩成)
그릇은 이루어짐이 늦다(大器晩成)
  • 승인 2020.07.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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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대경예임회 회장, 전 중리초등학교 교장


매일 밤 9시경 할머니 휴대폰 페이스 톡이 울린다. 예외 없이 경주 양남에 사는 맏며느리에게서 오는 영상통화이다. 휴대폰을 열자말자 두 돌이 훨씬 지난 둘째 손자 준이 얼굴이 보이면서 금방 끊어버린다. 몇 차례 연결을 해보지만 휴대폰을 가로챈 둘째 손자는 자꾸 끊어버린다.

준이는 두 돌이 넘었는데도 아직 말을 안 한다. 그 쉬운 “엄마! 아빠!”도 안한다. 첫째 손자 훈이가 너무 일찍 말을 하고 글자를 익힌 것과는 완전 대조적이다. 말은 잘 알아듣고 행동은 나이에 맞게 하는데 말은 하지 않는다.

며칠 전 할머니는 ‘준이가 왜 말이 늦지? 대기만성(大器晩成)이 되려나.’하면서 휴대폰을 끊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대학생이던 우리들은 막걸리 집에 앉아서 대포 잔을 기울이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던 말이 ‘대기만성(大器晩成)’이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성공하는 법이야!”하고 말이다. 그릇이 크면 그 곳에 담기는 내용물이 가득 채워지려면 늦어진다는 논리이다. 그 때 필자는 “아니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늦는 법이야. 그릇이 너무 크잖아!”하고 반발하였었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완성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전자는 큰 그릇에 담는 것이고, 후자는 큰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의미는 같은듯한데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옛날 서당에서도 뒤처지는 학동이 있으면 아버지는 “문리(文理)가 늦게 터지는 아이도 있는 거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늦는 법이야.”라고 하셨다. 뒤처지는 학동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 말이 ‘문리(文理)가 늦게 터진다.’였다.

노자의 도덕경에 ‘무한대의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보이지 않고, 큰 그릇은 이루어지는 것이 늦으며(大器晩成), 큰 소리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없으며, 큰 물체는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도(道)라고 하는 것은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그러나 오직 도(道)만이 천하 만물에게 힘을 잘 빌려주고 목적을 이루도록 해 준다.’고 하였다. 대기만성도 숨어 있는 도(道)와 같으리라.

후한 시대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있었다. 명심보감에 ‘한 평생 착한 일을 하여도 착한 것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말한 인물이다. 마원이 임지에 부임하려고 형인 최황을 찾아갔다. 최황은 “너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다. 목수가 나무를 골라서 다듬듯이 너도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라.”고 마원에게 일렀다. 마원은 ‘대장부가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곤궁해졌을 때 더욱 굳세어지고, 늙어서는 더욱 건장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마원은 중요하지 않은 겉치레에만 신경 쓰는 것을 싫어했다. 진정성이 없는 수식변폭(修飾邊幅)을 무척 싫어했다. 겉모양만 꾸미는 것은 수식(修飾)이고, 천의 가장자리 부분은 변폭(邊幅)이다. 마원은 올곧은 행동으로 대기만성 했다.

위나라 최염(崔琰)장군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재능이 뛰어났다. 조조는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최염이 과거에 합격하여 집에서 잔치를 베풀던 날 사촌동생 최림(崔林)도 함께 있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최염을 축하하면서 최림은 꾸짖었다. 그 때 최염은 사촌동생에게 다가가 “큰 종이나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걸려 천천히 만들어지는 법일세. 자네도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언젠가는 꼭 크게 성공할 테니 염려 말게. 내가 장담하지.”하고 어깨를 다독였다. 훗날 최림은 삼공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위나라 문제(조비)를 보필하였다.

언어를 쉽고 빨리 익히는 데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고 한다. 렌네베르그는 2세부터 사춘기까지 언어가 발달한다고 한다. 태어나서 울고, 자라면서 옹알이를 하고, 그 다음은 ‘엄마, 아빠’를 부른다. 말은 그렇게 시작되는 게 순서다.

휴대폰에서 “어머님, 준이가 말을 안 해요. 어떻게 해요?”한다. 할머니가 “아직은, 고마 개안타!”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옛날 할머니들은 모두가 순서를 기다렸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방법을 먼저 생각하고 조바심한다.

손자 준이가 개구쟁이 눈웃음을 치며 윗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기저귀를 벗는다. 그리고는 방바닥에 ‘쉬이’를 한다. 그리고 달려와서 휴대폰을 끊는다. 어떻든 사랑스럽고 귀엽다. ‘준아, 개안타.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늦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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