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손길 타지 않은 나무, 몽상으로 휘감다
사람 손길 타지 않은 나무, 몽상으로 휘감다
  • 황인옥
  • 승인 2020.07.1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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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예술회관 ‘올해의 중견작가’展…참여 조각가 이상헌
나는 ‘몽상가’다
쓸데없는 생각을
쓸데있는 가치로
만드는 게 예술가
결핍이 만든 작가적 존재
할머니와 지낸 유년
부모와의 생활 상상
외로움 스스로 달래
나무로 시선 돌리다
초기 돌·철·FRP 사용
뇌종양 앓으면서
친환경적 소재로 변화

기억과 감정의 변주
나이테 살려 인체 구현
새로운 희망 상징하는
의자·책 등 추가하기도

이상헌작가
이상헌 작가가 문화예술회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흔히 나무를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썩어 천년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불멸이다. 만약 나무에게 ‘죽어 천년을 예술작품으로 찬란하게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조각가 이상헌에게는 기껍게 몸을 내맡길 것 같다. 그는 불멸의 나무에 제2의 생명을 부여하는 나무예찬론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표현했다. “저는 나무에 제가 상상한 몽상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어요.”

조각가 이상헌은 예술가가 곧 몽상가(夢想家)라는 주제를 예술의 지렛대로 삼아왔다. 흔히 몽상가에 덧씌워놓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뿌리채 뒤흔든다. 스스로 몽상가를 자체하는 그는 “예술가는 순응보다 저항하는 편에 서야한다”는 소신을 견지한다. “예술가는 쓸데없는 생각을 쓸데 있는 가치로 전환하는 사람들이죠. 그런 점에서 몽상가와 예술가는 정확히 일치하죠.”

그가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에 선정되고, 최근에 함께 선정된 동료작가들과 전시를 꾸리면서 전시 제목을 ‘몽상가’로 정했다. “여전히 청년 같은데 어느새 중견작가라는 칭호를 달았다”며 수줍어하는 그에게 ‘몽상가’는 30년 예술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이상헌은 유난히 몽상가적 기질이 강했다. 이미 유년기부터 몽상가적인 기질이 스멀거렸다. 그는 맞벌이하던 부모와 떨어져 시골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부모의 부재로 인한 결핍은 외로움으로 점철됐다. 어린 그에게 상황을 반전시킬 힘이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뿐이었다.

“부모님과의 행복한 일상을 상상하며, 부모님과 떨어져서 오는 외로움을 달랬던 것 같아요.”

외로움도 운명이 있을까? 유년기에는 환경적인 요인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작가로 활동하는 지금도 그는 외로움의 연속이다. 주중에는 의성 작업실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대구의 가족 곁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혼자다.

“낮에 작업하고, 저녁에 작업실 옆의 살림집으로 퇴근을 하면 시골 생활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요. 지인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 없죠. 자연스럽게 책을 읽거나 멍하니 생각에 빠져드는 일이 많을 수 밖에 없죠.”

작업 초기에는 여느 조각가들처럼 돌이나 철, 섬유강화플라스틱(FRP)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하지만 뇌종양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궁여지책으로 재료의 변화를 모색했다. 건강을 위해 친환경적인 나무에 눈길을 돌린 것. 2002년의 일이었다.

건강한 소재로 선택한 나무였지만 깎을수록 자신과는 찰떡궁합이었다. 썩고, 뒤틀리고, 금가고, 벌레까지 갉아먹어 누군가의 손길을 쉬 허락하지 않는 나무에서 생로병사의 굴곡진 삶을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보게 되었다. 그 역시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유년기를 보냈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미술대학 진학에도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작가로 순탄하게 살아가겠거니 하던 시기에는 뇌종양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다.

“나무는 무생물인 돌이나 플라스틱과는 결이 완전 달랐어요. 살아서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죽어서는 비와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순응하는 재료였어요.”

그의 작품은 몽상가인 자신이 펼쳐놓은 상상의 세계다. 그를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 매염제는 ‘외로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어떤 작업을 펼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부터 ‘외로움’이 그의 의식을 건드렸다. “당시 몸 깊숙이 자리하던 외로움이 치고 올라왔어요.”

본격적으로 나무로 깎은 작품이 ‘사람’ 연작. 유년 시절 외로움에 지친 자신의 모습이 나무에 하나 둘씩 투영됐다. 길게 변형시킨 팔과 큰 손, 대못이 박히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가위 눌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을 외로움의 응어리를 토해내자 내면에 희미한 평화가 깃들었다. “나무를 깎으면서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외로움의 감정도 조금씩 옅어졌어요.”

분출하던 ‘외로움’이 잦아들자 조각의 재료로만 접근했던 나무에서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나무의 결이나 나이테에서 인체의 아름다움이 겹쳐졌다. 작품 ‘춤-몸짓’ 연작으로의 변화였다. “무희들의 다양한 춤 동작들이 조각으로 표현되었어요.”

춤 동작은 얼마 가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혔다. 무한정으로 확장되기에는 동작에서 한계점을 노출했다. 선택은 ‘춤’을 버리고 ‘몸짓’을 남기는 것. 춤에서 일상으로 소재의 확장이었다. 일상의 모든 몸짓이 조각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부터 일상의 몸짓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었어요.”

인간의 몸짓만으로 서사를 꾸려도 충분한데, 그는 층층이 서사를 겹쳤다. 인간의 형상에 의자, 나무, 책 등의 상징적인 소재들을 개입시켰다. 의자는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는 의자에 심리상태를 투영하거나 희망어린 미래를 은유적으로 담아내며 이야기를 중첩해갔다.

그가 비오는 날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의자가 또 다른 자아로 다가왔던 기억이었다. 그날은 예고없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수업을 마치자 자녀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로 학교는 활기가 넘쳤다. 어린 이상헌도 그 틈에 끼어 부모님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끝은 새드엔딩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일 나가신 부모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기다리는 척을 했었어요. 친구들이 모두 부모님과 함께 돌아가고 저만 남았을 때, 구석에 홀로 남겨진 의자를 보게 됐어요. 그 의자가 외로움과 서러움에 울고 있는 저의 모습같았죠.”

‘몸짓’ 연작에서는 매끄러운 형태미, 화려한 색채미에 집중했다. 조각에 초현실주의가 살짝살짝 엿보였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시각적인 요소들이며, 대중성의 확보였다. 그가 “예술성만 추구해서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타협점이 필요했다:고 언급했다.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어요.”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몽상가’ 연작. 미시적으로는 코로나 19라는 인류에게 닥친 불안정한 상황을, 거시적으로는 30년 동안의 작업의 주제였던 ‘몽상가’의 몽상 속 세상을 구현했다. “‘몽상가가 펼쳐놓은 세상’이라는 큰 주제는 변함이 없지만, 소주제는 그때그때 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감정들을 담았어요.”

전시작 ‘황금나무’는 정면이 뚫린 사각 틀 속에 가슴에 황금나뭇가지가 자라고 있는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고, 또 다른 작품 ‘은둔자’는 사각 틀에 돌려놓은 의자를 세웠다. 사각틀은 이전 작업에서 보여준 기억상자와 의자의 변형으로 작가의 자아를 은유한다.

황금나무가 가슴에서 자라나는 사람이나 자아로 대변되는 돌려진 의자는 희망에 대한 은유다. 깨달음에 대한 염원을 수행의 형상으로, 안정적인 세상에 대한 염원을 황금나뭇가지에 담아냈다. 희망의 전령사는 아무래도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남자의 형상.

“살면서 생긴 상처는 언젠가는 딱지가 앉고, 상처를 발판으로 새살이 돋듯이,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도 언젠가는 우리 곁에서 물러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내고자 했어요.”

현대미술은 매체의 한계를 불허한다. 조각과 영상, 평면, 사진 등 다양한 매체가 주저없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상헌은 시대적인 흐름에서 조금은 비껴나있다. 오직 조각만을 고집해 온 것. “저는 여러 매체를 섞으면 이야기가 희석되는 느낌이 있어 오직 조각으로만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어요.”

작가가 ”이제는 많이 내려놓았다“고 했다. 매끈하던 형상도 투박한 날것의 질감을 살리고, 강도 높은 작업 노동에 대한 시각도 유연해졌다. 나이가 주는 수용적인 태도의 결과였다. 그가 “나무는 긴 시간 기다림이 필요한 재료”라고 했다.

“나무가 저를 허락할 때까지 소통을 한 후에 밀도감 있는 노동을 투입하죠. 그래야 묵직한 울림을 주는 조각을 만들 수 있죠. 하면 할수록 나무의 매력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나무와 함께 할 수 있어 늘 감사하며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상헌과 김봉천, 김영환, 김윤종, 윤종주 등이 함께하는 대구문화예술회관 ‘2020 올해의 중견작가’전은 8월 15일까지. 문의 053-606-613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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