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정자·작은 폭포…자연을 관조하며 하나되다
아담한 정자·작은 폭포…자연을 관조하며 하나되다
  • 채영택
  • 승인 2020.07.2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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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숲 그리고 자연이야기 - <29> 정원이야기
韓, 자연을 희생의 대상 아닌
합일·동일화 대상으로 여겨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
中, 가장 인간 중심의 정원
자연을 인간 세계로 끌어들여
‘자연 회귀’ 숙명적 한계 표현
日, 온갖 자연재해 끊이지 않아
이끼와 바위로 죽음을 관조
윤회적 생명 불교 철학과 맞물려
작약
화상(花相)으로 불린 작약의 모습.
 
우리나라정원의수경시설
우리나라 정원의 수경시설.
 
고택의내부조경
고택의 내부 조경 모습.

중국 주나라에서 태동한 유교문화는 공자가 집대성했다. 유교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데 큰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당시 주나라의 분권적 봉건제도로는 거대한 중국 대륙을 직접 다스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주나라 무왕은 백성 앞에서 천자(天子)임을 선포하고 각각의 영토를 제후들을 통해 다스리도록 했다. 하지만 공자의 뜻대로 봉건제도는 유지되지 않아 결국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쳐 봉건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교문화는 삼국(위·촉·오) 시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도 이러한 중국의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양반제도는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과거 중국은 특정 나무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데 활용했다.

강판권 교수에 의하면 특히 농사와 제사의 신을 모신 종묘사직단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두 나무는 늘푸른 큰키나무로 영원성을 상징하며 농사는 땅을 통해서만 지을 수 있고 하늘의 이치는 나무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나라에서는 해마다 다섯 차례 나무를 이용해서 불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를 개화령(改火令)이라 했고,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여름에는 살구나무와 대추나무, 한여름에는 뽕나무,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졸참나무, 그리고 겨울에는 회화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얻었다고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불은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매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불의 사용은 국가조직 안에서 힘과 권력으로 상징되었다. 즉, 불은 나무에서 오고 계절마다 나무를 바꾸는 일은 곧 민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 태종 때도 개화령이 있어서 병(역질)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동양권을 대표하는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 적용된 정원의 특징도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가 났는데 중국의 원림은 동아시아 세 나라중 가장 인간 중심의 정원이라고 했다. 자연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들여 내부에서 외부의 자연을 깊이 탐색하도록 한 것이다. 자연의 밝음과 정원의 어둠을 통한 대비로 거대한 자연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중국의 정원은 자연과 인간과의 경계도 대체로 분명하였다. 하지만 당대 이론가였던 ‘계성’의 「원야」에는 “비록 사람이 만들더라도 그것은 본래 자연처럼 해야 한다”라고 결국 자연으로 회귀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정원은 세 나라 중에서 가장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것은 선비나 서민의 구분 없이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도 모호했는데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도 중국과는 차이가 있어 열려 있는 공간인 작은 정(亭)과 연못 가운에 있는 원도(圓島)를 통해 자연을 관조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다.

낮은 담, 그 속의 원도, 그리고 작은 폭포와 계류(溪流), 아담한 정자, 물 속에 비치는 아름다운 나무의 그림자와 바람과 새의 소리를 자연 속의 자연이라고 할 정도로 작은 공간에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의 본성을 귀로,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그리고 몸으로 느끼고자 했다. 이렇듯 우리네 선조는 자연을 희생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과 동경 혹은 동일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우리와 지척에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진이나 해일, 화산 폭발 등 온갖 자연 재해가 끊이지 않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그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 있고 오랜 세월 그 죽음을 관조하는 마음이 불교의 선종과 결합하여 관조적 정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 정원의 황금기인 무로마치 시대 정원의 풍경은 이끼와 바위, 대나무, 그리고 물의 흐름과 파도를 나타내는 모래의 역동성이 한데 어울려 일본 정원의 독특한 풍광을 자아낸다.

오래된 이끼는 습하고 찬 곳에서 잘 자라며 뿌리가 없고 유성과 무성세대를 번갈이 살아가는 지구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생물이다. 바위의 영원성과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끼는 인간이 죽으면 태초의 깨끗한 생명으로 회귀하고 그러한 윤회적 생명이 불교 철학과 맞물려 자연의 내면을 성찰하는 관조적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특히 이 당시 귀족 신분은 자연과 교감하면서 야생식물을 채집해 앞마당에 심기도 했는데 이를 ‘센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정원이 있는 마당 앞쪽에 각종 초화류를 심어 그것과 일정 부분 떨어져 시적 교감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문예운동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정의된 우리나라 민속에 얽힌 관습적인 그림이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여 그린 생활화를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하여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서 구입되는 그림” 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민화(民畵)’라 했다. 주로 평민이나 상민층에서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림속에 나타난 여러가지 동물과 식물, 자연경관, 기호 요소 등 그 중에서 식물의 요소를 보면 초본류(모란, 연밥, 국화, 금잔화, 들국화, 코스모스, 패랭이, 난초, 도라지, 나리, 맨드라미, 영지, 파초, 죽순, 창포, 억새, 조, 연), 목본류(소나무, 대나무, 오동나무, 버드나무, 석류, 배, 매화, 복숭아, 목련, 단풍, 진달래), 과일류(포도, 감), 채소류(참외, 가지, 수박, 딸기) 등 식물 요소가 총 35가지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화는 서민이나 평민층에서 그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눈에 보이는 사물의 묘사를 넘어 자연과 정신이 하나되어 이것은 결국 우리 민족이 꿈꾸고 살아왔던 삶의 바탕으로 승화되어 미의식과 다양한 의미의 상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양반층의 전유물이었던 정원의 구성요소와 서민 평민의 민화에 나타난 사물에 대한 인식에는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의 구황식물적 요소와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내면의 정신성은 양반이든 서민이든 그 지향점은 결국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민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식물은 모란과 연 그리고 국화다.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은 「사물기원」에 의하면 수나라 양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고 당나라 때는 궁에서나 민간에서나 서로 다투어 가꾸면서 모란을 화중왕(花中王)으로 삼고 작약을 화상(花相)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란도 병풍’은 양반들만 쓸 수 있었는데 서민들은 동네에 마련된 한 개의 병풍을 혼례 때나 각종 의례시 빌려 사용하기도 했다.

연(蓮)은 꽃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유일한 식물이다. 연 그림에는 백로가 등장한다. 백로는 때묻지 않는 선비의 고고한 자태를 나타내는데 백로와 연꽃을 함께 표현하여 과거급제를 뜻했다. 백로는 길을 뜻하는 로(路)자와 독음이 같고, 연밥, 즉 연과(蓮果)는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다’는 의미를 지닌 연과(蓮科)와 독음이 같아 일로연과(一路蓮科)라 하여 한번에 과거에 급제하라는 소망이 담긴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국화는 고려 충숙왕때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의종이 뜰 앞에 국화를 심어 즐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길상과 상서의 상징으로 여겨진 국화는 군자의 충의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겠다. 이렇듯 식물의 본성을 인간의 내면에 투영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상징적 의미는 크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하였으며, 식물의 색채를 이용한 천연염색으로 양반과 서민의 지위의 높고 낮음을 관복의 색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가장 고귀한 색은 자색이라하여 지치(Lithospermum erythrorhizon, 꿀풀목)에서 얻었고, 다음이 잇꽃·소방목의 붉은색, 치자·황백·울금·조개풀의 노란색의 염색을 하였다. 천연염색은 1856년 영국의 퍼킨이 합성염료를 발견하기 전까지 자연으로부터 색채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식물에서 추출된 독특한 염료의 색깔로 의복에 물을 들여 신분을 구분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던 서유구(1764~1845)는 자연을 조용히 즐기는 은자의 삶보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나무를 심고 꽃과 식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의 농서 임원경제지의 ‘이운지’에서는 은자가 취미생활에 관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제시한 다양한 유형의 정원 중 아무것 하나를 조성하고, 그 안에서 임원 생활과 관련된 나무심기, 울타리 만들기, 길 내기, 연못 등의 조경 요소들을 단계적으로 구성하며 재미를 찾고자 지속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 전기 낙향 선비들의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삶과는 달리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이운지와 상택지를 통해 본 조선 후기에는 인간의 삶과 함께하는 실용적 격물치지와 실학적 자연관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동양정원의 양식과 선비와 평민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그 자연요소를 개발과 보존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반추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임종택<나무치료사·대구한의대 대학원 환경조경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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