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버렸더니 펼쳐진 白色 향연…호반갤러리, 양성옥 ‘흐름’展
욕심 버렸더니 펼쳐진 白色 향연…호반갤러리, 양성옥 ‘흐름’展
  • 황인옥
  • 승인 2020.07.2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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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간다”
투병 중 깨달은 단순한 사실
빗자루 흰 물감 적셔 ‘슥슥’
“순수 상태가 곧 道의 세계”
전작부터 신작까지 한눈에
개막일인 28일, 산문집 출간
양성옥작쓸다_두드리다
양성옥 작 ‘쓸다_두드리다’

살면서 시련을 피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닥친다. 그런데 시련이 불행한 결말로만 점철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절망이라는 무거운 기운이 세상을 집어삼키며, 살아갈 의지는 원천적으로 꺾여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오묘해서 시련 속에 희망의 씨앗 하나를 숨겨놓고 있다. 단지 발아에 대한 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돌려놓았을 뿐. 불굴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자에게는 성장이라는 달콤한 결실을 내어주지만 굴복할 경우는 나락이 기다린다. 이때 관건은 의지. 시련에 처한 당사자가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작가 양성옥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시련과 맞서왔다. 사력을 다해 어둠의 터널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는 중이다. 그녀가 “어쩌면 내게 닥친 시련은 신이 나와 오롯이 만나기 위해 주신 선물이었을지 모른다”며 해맑게 웃었다. 여전히 오른손과 오른 다리가 불편하고, 말도 어눌한 상태지만 “덕분에 지독한 자기반성의 계기와 내적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며 특유의 호방한 기색을 내비쳤다.

“말이 안 되니 세상과 차단되면서 절망으로 울부짖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직자들은 일부러 묵언수행도 하는데 나도 이 시련을 묵언수행의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성찰의 시간들이 이어졌고, 세상과 단절된 대화는 신과의 대화로 변화했다. 불행을 영성의 시간으로 채우고자 한 시간들이었다.

양성옥이 쓰러진 것은 2004년 1월 점심 직후, 식기를 개수대로 옮기던 중 의식을 잃었다. 3일간 혼수상태로 있다 깨어났지만 현대의학으로는 회생불가였다.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 놓여졌다. 참 많이도 울었고, 자존심은 생채기 날 대로 났다. 상대를 알 수 없는 원망은 하늘을 찔렀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내려쳤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죽으면 하느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 하겠구나”하고.

그때부터 걷기가 시작됐다. “죽어도 뒤틀린 몸은 바로세우고 죽겠노라”는 한 생각으로 밤이면 현관문을 나섰다. 기우뚱 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인적이 드문 밤 시간대에 걷기 운동이 시작됐다. 걷기에 사력을 다했지만 회복은 느렸고, 절망은 깊어갔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죽고 싶은 날들을 삶의 의지로 채워가는 시간들이 쌓이자 몸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쓰러지고 쳐다보기도 싫었던 작업에 대한 의지가 새롭게 움튼 것은 2009년. 손자와 함께 공룡 시리즈를 그릴 기회가 있었는데 어눌했지만 그림이 그려졌다. 손자의 그림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친김에 손자와 함께 2인전을 열었다. “손자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끌어내 주었다는 생각에서 손자가 하느님처럼 보였어요. 그만큼 그림을 다시 그린다는 것이 제게는 기적처럼 다가왔어요.”

쓰러지고 난 후 정식으로 초대된 전시는 대구비평연구회 기획전. 당시 그녀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문지로 풀죽을 만들어 버려진 물건에 붙이거나 진흙으로 토우를 만들어 전시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후인 2020년 7월 28일, 수성아트피아에서 그녀의 초대전을 기획했다. 전시 제목은 ‘흐름’전. 작가 양성옥과 인간 양성옥이 흘러온 여정을 전시로 꾸려낸다.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의 작업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전작들과 최근에 새롭게 시도한 신작들이 걸린다. 1회 개인전에 전시했던 작품 2점, 2회 개인전 작품 2점, 3회 개인전(질경이) 작품 3점과 13회까지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들과 신작 등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새롭게 소개하는 ‘백색회화’에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내가 이것을 만들려고 이런 시련을 견뎌냈구나”라며 새하얀 캔버스 앞에서 짧은 탄성을 질렀다. 빗자루에 흰 물감을 듬뿍 적시고 흰 캔버스를 쓴 후 나온 결과였다. 작가는 이 흰 그림에 ‘백색회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먹으로 쓰는 작업에 집중하다 오방색으로 변화를 모색하던 중에 나온 흰색이었다.

백색회화는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궁극의 순수였다. 작업을 시작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화두 ‘도(道)’에 대한 해답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작가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순수 상태로 태어났는데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죽을 때 다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수 상태로 죽는다”며 “이 단순한 깨달음을 위해 내가 쓰러진 것 같다”며 백색회화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죠. 그러나 무언가를 하려는 욕망을 비워내니 오히려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평화가 찾아왔어요. 그것이 제게는 백색회화에요.”

흰 캔버스에 흰색으로 쓸어서 무엇이 나올까 싶지만 의외로 효과는 간단치가 않다. 물감이 주는 질감에서 다양한 형상들이 튀어 올랐다. 색이 사라진 세상인데, 흡사 도인들의 세상같은 순수가 반짝였다. “백색으로 드러난 세상은 도(道)의 세계였어요. 아프면서 처절하게 비워내고 내려놓은 저 자신처럼 다가왔어요.”

이번 전시에는 백색회화 말고도 ‘텅빈 사람’ 연작도 소개된다. 사람을 그렸는데 속은 텅 비고 형태만 남긴 작품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색으로 가기 전의 마지막 한 점의 욕망을 움켜진 인간”이다.

백색회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결과라기보다, 작업을 시작하고 화두로 삼았던 ‘도(道)’에 대한 탐구의 결과다.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고 첫 작업으로 내놓은 들풀 작품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들풀에 선화(禪畵)를 접목했다. 이후 질경이로까지 소재를 확장하며 만다라에 질경이를 그렸고, 마침내 백색회화로까지 이어졌다.

“들풀의 생명력과 치유력에 본능적으로 사로잡혀 들풀에 저 자신을 투영했고, 무질서 가운데 상생(相生)의 가치에 순응하는 자연의 질서를 들풀 만다라로 풀어내려 했어요.”

붓 대신 빗자루를 든 것은 대학원 진학 전인 1999년 12월,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에 무려 4톤에 해당하는 대빗자루로 만든 ‘빗자루 설치 작품’을 선보이면서다. 4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그림을 시작했고, 남과 다른 작업세계를 모색하던 중에 만난 것이 빗자루였다.

설치작업으로 만난 빗자루는 이후 진화를 계속했다. 대빗자루에 먹물을 찍어 캔버스에 수십 번 수백 번 중첩하며, ‘쓸다’ 연작을 토해냈다. 이후 쓰는 작업과 찍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때부터 작가 양성옥에게 빗자루 작가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빗자루 작업은 빗자루로 청소하다 도(道)를 깨달은 선(禪)불교의 중흥조인 혜능 대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쓸기 작업은 여전히 제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요 먹으로 쓸며 다양한 변주를 계속하고 있고, 최근에는 흰색으로 쓸어 완성한 백색회화로까지 발전했어요.”

전시 개막일에 맞춰 그녀의 세 번째 서적인 산문집 ‘나의 삶과 그림’도 출간된다. 쓰러지기 전에 썼던 산문과 투병 기간 중에 끄적거렸던 사유 등이 산문집에 실렸다.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그동안의 내 삶이 정리가 되었다”며 책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예전에도 글을 썼지만 아프면서 쓰는 글은 더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글을 쓰면서 억울했던 마음이나 상처받은 마음이 정화되고, 지금까지의 제 삶과 작업이 일단락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전시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053-668-156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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