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빚어낸 듯 몽환적 풍경…비밀정원으로의 초대
안개가 빚어낸 듯 몽환적 풍경…비밀정원으로의 초대
  • 황인옥
  • 승인 2020.08.0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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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까지 비디갤러리서 서양화가 김상열 초대전
김상열 초대전
김상열 초대전이 8월 5일까지 비디갤러리서 열린다.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경외심
독특한 기법 ‘그림자 회화’로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입혀
덧칠·지우기 수십차례 반복
독특하고 오묘한 분위기 연출

서양화가 김상열이 휴대폰 사진앨범에 저장된 인물화 한 점을 보여주면서 “잘 그리지 않았냐?”며 수줍게 웃었다. 붓 터치가 살아있고 기운이 넘치는, 잘 그린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대학 1 학년 때 사진을 보고 과제물로 그린 그림”이라는 것. 대상을 꿰뚫는 관찰력과 기운 생동하는 표현법에서 중년의 김상열이 그렸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한 수준이었다 “사진을 보고 재현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곧잘 그렸던 것 같아요.”

그림의 성장 과정을 단계별로 나눌 때 ‘대상 재현’은 첫 단계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재현’이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는 덕목이다. 한창 배움의 시기인 대학 1학년생이 재현에 특화되어 있다면 분명 강점으로 작용했을 법한데, 미술학도 김상열의 의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신감이 충천할수록 “내가 누구인지?”라는 발칙한 질문들이 올라왔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요. 사진을 보고 그리는 단순한 재현에 대한 그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때 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과연 내가 그림을 통해서 무얼 이야기 할 것인가?”, “내가 어디에 영향을 받았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이 누구인지’라는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다. 작가는 당시를 “참 오만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지만, 작가의 화업 인생에서 의식의 흐름을 바꾸는 일대 전환기였음을 인식하면 중요한 시기임에 분명하다.

“그때부터 나는 좀 다르게 사물을 이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지난달 17일 개막한 서울 소재의 비디갤러리에 ‘바람의 정원’ 시리즈가 걸렸다. 그는 지난 10여년간 ‘비밀 정원’ 시리즈와 ‘바람의 정원’ 시리즈에 완성도를 더해왔다. 두 시리즈 모두 대상은 자연이다. 작가는 안개에 휩싸이거나 눈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풍경을 표현해왔다.

나무나 숲 등의 자연에 대한 애틋한 정서는 고향 경주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명절에 사촌들이 한 방에 나란히 누워 재잘거리며 바라보았던 창호지너머로 비친 달빛과 서걱서걱대며 흔들리는 댓잎이나 감나무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며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이 작업의 단초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현실의 자연은 작가의 손끝에서 눈이나 안개라는 비밀스러운 현상과 맞물리며 몽환의 자연으로 거듭난다. 워낙에 몽환적이어서 드라마 같은 사연 하나쯤은 품었을 법도 한데,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 “치열한 삶의 고뇌가 난해한 개념으로 치장하는 대신, 자연이라는 명료한 소재로 예술의 본질을 향한 사유의 공간을 구축했다”는 것.

말하자면 자연에 이입된 사유의 세계다. 눈과 안개가 현실 자연을 품으면서 심연의 고요, 태고의 신비로 거듭났다. 작가가 “자연의 본성이 작동하는 ‘이상향’”이라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대학 1학년 때 느꼈던 단순 재현에 대한 반동의 결과다. 재현에서 관념으로의 변화다.

그가 “힘들 때 자연을 바라보면 자연에 스며들며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이상향이 멀리 있지 않다. 자연이 곧 이상향이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동양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자연의 도(道)가 곧 마음의 도라는 동양철학의 정신이 녹아있어요. 현상적인 자연에 심상의 잔상을 입혔죠.”

자연에 관념의 옷을 입히는 것과 동시에 기법적인 독자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신비로우면서도 경외심 가득한 자연의 미감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화면에 옮길 수 있을까”하는 갈망은 커져 갔고, 어느 순간 붓을 버렸다. ‘그리는 방식’ 대신 판화와 유사한 ‘떠내는 기법’을 끌어들였다.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감성의 일명 ‘그림자 회화’의 시작이었다.

“15년 전, 청도 폐교에 마련한 작업실 청소를 하면서 창문틀에 놓아둔 음료캔을 집어들었는데 먼지로 뒤덮인 주위와 달리 캔이 있던 자리는 깨끗했어요. 그걸 보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쩌면 다른 태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림자 회화’는 오묘함으로 점철된다. 한국화의 먹그림인지, 사진 혹은 판화 기법인지 판별이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명징하게 그의 그림은 캔버스 바탕에 아크릴 물감으로 완성한 수작업의 결과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붓을 놓고 버텨낸 창의적 인내심’의 보상이다.

‘비밀의 정원’ 시리즈의 제작 과정의 첫 순서는 바탕 작업이다. 캔버스 물성이 사라질 때까지 표면을 곱게 처리하고, 어두운 바탕색을 여러 번 덧칠한다. 그 위에 자연에서 채집된 오브제(대개 여러 종류의 이파리나 여린 나무줄기)를 원하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연출해 올려놓는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오브제가 놓인 화면에 흰색 물감을 분무(噴霧)해 지워 나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형상’을 얻어낸다. 가까운 주변 자연환경에서 채집된 이파리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자 회화’는 마치 안개 낀 비밀스런 정원에 초대된 듯 아련하다.

화면은 표면적으론 단색(單色)이다. 블랙, 블루, 레드, 옐로가 표면을 장악한다. 그러나 바탕의 주조색 그 이면에는 수많은 색이 잠들어 있다.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은 바로 이 이면의 색들로부터 올라온다.

한국화의 발묵법(潑墨法)을 연상시키거나,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은 단색의 사진 작업에 비유될 만큼 신비롭다. 꿈을 꾸는 듯이 연출된 화면은 빛과 그림자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철저하게 ‘회화적 손맛’을 제거해서 ‘회화 같지 않은 회화’를 완성한 결과다. 해외에서도 그의 작품은 동양적인 색다른 미감 때문에 호감을 얻고 있다.

작가는 현재 진행 중인 서울개인전 ‘wlnd garden-바람’이라는 주제전에서 또 한 번의 변화를 알렸다. 그동안 발표한 단색조의 작업과 달리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색면을 드러냈다. 색면의 출현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비가시적인 바람의 빛깔과 소리를 캔버스에 담으려 한 결과”다.

미묘한 변화로 드러난 색면을 배경으로 한 자연 이미지는 신묘함의 깊이를 더한다. 바람을 머금은 듯 떨림과 흔들림을 시각화한 결과다. 그러나 변화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캔버스 하단의 일부를 비워 작업이 진행 중인 듯 물감을 흘러내렸다. 그 역시 긴장감의 물을 한껏 올리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예술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유의 공간을 위해 수많은 노력들이 스며들었어요.”

‘비밀정원’이 반응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철저하게 아웃사이드였다. 공모전에서 큰상을 받은 주목받는 작가도, 해외유학파로 촉망받는 작가도 아니었다. 소위 제도권에 있는 잘나가는 작가가 아닌 철저한 아웃사이드였다. 그가 “그래서 작업을 하는데 있어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도, 누구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다”며 긍정의 말을 했다.

아웃사이드 김상열이 ‘비밀의 정원’으로 날개를 달았다. 서양의 재료로 전통회화에 반기를 들면서도 동양의 사유를 담아낸 그의 작품에 국내외의 관심이 표면화되고 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리로이얼(LeRoyer) 갤러리와 뉴욕의 아트레드(Artered) 갤러리에서 상설전을 가진데 이어, 2014년부터 세계12개국에 지점을 두고 있는 오페라갤러리, 2015년엔 이탈리아 밀라노의 가구회사인 Company SHSdesign사와의 콜라보 작업을 진행했다.

지난 10월에는 ‘2019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부대행사로 열린 경주솔거미술관의 대형 기획전에 초대되고, 올해 초에는 일본과 서울 갤러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일본 전시는 코로나 19로 연기됐다.

그가 50대 중반을 넘긴 지금에서야 “이제야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좋은 작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자족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해갈 내공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작가의 기준은 명료했다. ‘늘 생각나게 하는 작가?’ ‘다음 작업이 궁금해서 전시장을 꼭 찾게 만드는 작가’, ‘작고 보잘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될 때 끝까지 밀어붙이는 근성 있는 작가’, ‘의식 있는 작가’, ‘책임감 있는 작가’ 등이다.

“좋은 작업 못지않게 좋은 작가로 남고 싶다”는 김상열 초대전은 8월 5일까지 비디갤러리. 문의 02-3789-3872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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