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이별
잠시 이별
  • 승인 2020.08.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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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호

이제 시를 놓아야겠다고

더 이상 결빙된 음절의 낱말로 통증에 시달리기 싫다고

해서 너 따위에게 나를 주지 않겠다고

채집된 시어들과 모음과 자음을 골방에 쑤셔넣고 걸어 잠궜다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나지막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지겨워하던

시가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화장실 변기물을 내리면 옹달샘이 되는 걸 보면서

횡단보도 사람들의 떠밀려 살아가는

고단한 표정을 읽으면서

베란다 방충망에 걸려 죽어라 울어대는 매미소리

귀에 쓸어 담으면서

싸매둔 단어들이 아지랑이처럼 몸 안에서 아른거리고

누워있던 시어의 수풀들이 무성하게 흔들대고

봄날 꽃가루처럼 눈앞에 날아 다닌다

떠나듯 돌아서면 다시 매혹하는 손짓에

벼랑에 매달려 기어오르며 또다시 붙잡는 시

아무래도 내가 나에게 속은 것 같다

끝내 찍지 못한 마침표

◇이필호= 1959년 경북 군위 출생.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삶과 문학 회원, 대구 작가회의 회원, 2017년 시집 <눈 속의 어린 눈>

<해설> 생각이 멈춰지면 지금 밟고 있는 땅 지구가 없고, 머리 위에 있는 하늘 우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생각의 인식 범위에 있다. 그런데 생각 그 자체가 허상이니, 이 모든 것도 허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사람들은 현재 차원과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며 추측해왔다. 인간은 언제 멈출지 모르는 유한한 생명의 시간 속에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가지고 지금의 차원을 살아가고 있다. 여러 종교에서 언급되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명제를 두고 비관주의와 긍정주의가 참과 거짓으로 구획하며 치열하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설파한다.

붓다가 14 무기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차원에서 대답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되어서 허무한 게 아니라, 비록 이 모든 게 허상이고 헛되다지만 기쁘고 슬픈 것을 느낄 수 있어 행운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저 주어짐에 감사해야 한다. 그냥 우리는 고맙게 즐기면 된다.

인생이란, 흐르는 물처럼 살며 내면을 깊이깊이 채워서 흘러넘치는 삶의 향기로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채우고 채워진 무거운 삶을 가볍게 조금씩 비우고 비워서 텅 빈 삶을 그냥 자유로이 누리는 일이다.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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