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용전마을] 용 형상 계곡 첩첩산골에 ‘웰빙 삶’ 누리러 오세요
[경산 용전마을] 용 형상 계곡 첩첩산골에 ‘웰빙 삶’ 누리러 오세요
  • 배수경
  • 승인 2020.08.0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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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과 연관 ‘용 설화’
밭 모양 마치 용 앉은 듯 하고
위~아랫마을 꿈틀대는 형상
산이 품은 물길도 ‘구불구불’
 
구룡산 용재 아래 반룡사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경산 용전마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고즈넉한 마을이다. 전영호기자
구룡산 왕재 아래 반룡사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경산 용전마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고즈넉한 마을이다. 전영호기자

 

2020 경상북도 마을이야기-경산 용전마을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의 설화가 살아 숨 쉬는 구룡산 왕재 아래 반룡사가 마을을 굽어보는 용전 마을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고즈넉한 마을이다. 포도와 복숭아밭이 산야로 넓게 펼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는 구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논둑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산이 품고 있는 이 물길을 따라 6개의 마을이 있는데 용성면에서는 이곳을 육동이라고 하고, 용전마을은 육동 중에서도 산 쪽으로 깊숙한 곳에 있다. 어느 마을이 더 골짜기 마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육동은 예전에는 산 첩첩 물 첩첩한 산골 마을이었다. 지금은 포장이 잘 되어 있는 비오재를 예전에는 눈물의 고개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이 재를 넘어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는데 비 오는 날이면 교복은 가방에 넣고 사복을 입은 채 학교에 와서는 흙탕이 된 옷과 신발을 수돗가에서 씻어 넣고 교복으로 갈아입곤 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비오재까지 눈길을 쓸어 놓으면 아이들은 그 길을 밟으며 학교로 다녔다니 육동 마을은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동네이다.

 

구룡산 內 6개 마을 ‘최고 골짜기’
다수 농가 포도·복숭아 재배
캠벨·샤인머스컷 등 種 다양
공용 찜질방, 50여가구 쉼터로

그런 비오재가 지금은 넓게 포장이 되어 도시민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고 있는데 비오재 너머 육동 마을에서 미나리가 생산되면서 도시민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산 위 마을, 오염될 것이라고는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니 마을 자체가 청정 지역이다.

용전마을-복숭아
용전마을은 포도와 복숭아 농사를 많이 짓는다. 사진은 복숭아 나무.

 

포도가익어가네
용전마을은 포도와 복숭아 농사를 많이 짓는다. 사진은 포도 나무.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펼쳐진 들판에서는 포도가 익어가고 있다.
비가림막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펼쳐진 들판에서는 포도가 익어가고 있다.

 

용전 마을은 육동에서 많이 하는 미나리 재배보다는 포도와 복숭아 농사를 더 많이 하는 편이다. 미나리 농사를 지으려면 젊은 사람이 필요한데 전체적으로 주민들의 평균연령이 높은 탓이다. 비가림막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펼쳐진 들판을 다녀보니 포도가 막 익어가고 있었다. 어릴 때 저렇게 포도가 익어가면 어른들 몰래 익은 포도알을 빼먹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재미도 잃어버렸다. 울긋불긋 익어가는 포도밭 사이로 노랗게 봉지를 씌워놓은 포도밭이 보였다. 비싸다고 유명한 샤인머스켓 포도였다. 봉지를 슬쩍 만져보니 굵은 포도알이 손에 잡혔다. 오랜 장마끝이었지만 포도는 그럭저럭 알이 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난스러웠던 올해 장마 때문에 캠벨이라는 포도 품종은 익으면서 조금씩 썩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포도는 습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긴 장마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장마가 끝나고 30도를 넘나드는 쨍한 햇살이 들판에 내리쬐고 있으니 머지않아 포도송이 알알이 단물이 들 것이다.  용전리는 반룡사 아래 밭이 많은 곳인데 1370년대 김해 허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김해 허씨들이 거의 떠났는데 마을의 밭 모양이 용이 앉은 모양과 같다고 하여 용전이라 불리었다. 용성면 중심에 용산이 있고 용산에 있었던 성 이름을 용성면이라고 하는 데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용성면에는 용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마을 뒤 반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반룡사는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전영호기자
마을 뒤 반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반룡사는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전영호기자

 

661년 원효 창건 ‘반룡사’
1641년 큰절 완성했으나 소실
과거 산 전체 ‘거대한 절’ 추정
현재 중턱에만 일부 남아 반겨

마을 뒤 반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반룡사라는 이름도 역시 이 용과 관련되었다. 반룡이란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을 말하는데 육동 마을의 가장 위에 있는 부일부터 가장 아랫마을인 가척까지가 거대한 한 마리 용의 꿈틀거림 같다. 그 중에서 특히 반룡사가 있는 용전 마을은 그 용의 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구불구불한 계곡과 그 계곡을 따라 있는 마을의 형상이 용과 흡사하다.

반룡사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7년경인 661년경에 이 지역 출신으로 알려진 원효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신라의 맹장이었던 김유신과 김인문이 경산의 군주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무열왕이 백제 토벌을 위하여 구룡산을 통해 입성한 사연으로 반룡사 뒤 구룡산을 왕재라 부르기도 한다. 이 왕재 오르는 길 옆으로는 예전에 반룡사의 주춧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산골짝 여기저기에 부도탑이 나뒹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그 흔적들도 모두 사라지고 거대했던 반룡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새로 증축한 건물이 예전 반룡사의 흥망성쇠를 모두 전하기에는 아쉽고, 밭 여기저기에 있었다는 주춧돌이라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사적지로나 남았을 텐데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조선 인조 14년이었던 1641년에 법당을 새로 세우도록 한 후 60여 년에 걸쳐 5개의 암자와 26동의 대가람을 완성하였으나 이 역시도 임진왜란과 몇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암자가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마을 뒷산의 깨어진 기와 조각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으로만 전해지는 부도탑, 주춧돌 뿐이니 그 기억마저도 소실되고 나면 흔적도 잊혀질 것이다.

이런 오랜 역사와 전통을 품고 있는 반룡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용전 마을은 현재 50여 가구가 살아 가는데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과 오랫동안 마을을 지켰던 어른들이 오래된 당산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산비탈 밭에서는 무더운 햇살 아래 복숭아가 발갛게 익어가고, 한가로이 부채를 든 어르신들이 낯선 방문객을 무연하게 바라보신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마을 전체에 내려앉았다.

육동 마을은 굳이 구분하여 여섯 개의 마을 이름이 있지만 사실은 한 마을이나 다름 없다. 아이들이 다니던 작은 초등학교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농사용 트럭들이 가끔 오갈 뿐 한적한 곳이다. 봄이면 미나리를 먹으러 오는 상춘객들이 많이 드나들지만 그것도 한 계절뿐이다. 비오재 너머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듯한 마을이 고요하게 햇살을 받고 있을 뿐, 나른한 평화로움이 넓게 펼쳐진 마을이다.

최대억기자·천영애 시인

 

 

[우리 마을은]

마을이야기경산-인터뷰2
경산 용전마을 정연지 위원장

"반룡사가 굽어살펴 우환도 사라지는 곳" 정연지 위원장 

“아주 조용한 동네입니다. 마을이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뒤에 반룡사가 있으니 큰 우환도 없고, 저도 조용한 동네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이 마을로 들어왔지요.”

이 마을에서 자라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는 경산 용전마을 정연지 위원장의 말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선한 인상의 정 위원장은 요즘 농촌 마을이 급속하게 고령화되어 가는 가운데 보기 드문 젊은 사람이다. 포도 농사와 복숭아 농사를 짓는 정 위원장은 나이가 젊은 탓에 마을을 돌보고 있는데 그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위원장을 맡은 덕분에 마을 여기저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비닐 쓰레기들을 아무리 집하장으로 가져 와서 분리수거하라고 해도 잘 안 했는데 얼마 전부터 물 받으러 오면서 공터에 갖다 놓으라고 했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젊은 사람들이 저걸 또 정리해야죠. 비닐 같은 걸 들판에 그대로 놔두면 환경이 지저분해지거든요.”

정 위원장의 말을 듣고 돌아보니 마을 옆 공터에 비닐 분리수거장이 있었다. 일반 비닐과 검은색 비닐을 분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나무로 불을 지핀다는 찜질방이 있었는데 여름철에는 잘 사용하지 않더라도 겨울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든다고 했다. 나무로 불을 지피니 화력이 좋아서 뜨끈뜨끈한 찜질방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35도를 넘나드는 더운 날씨에 마을의 과수원과 마을 뒤 반룡사에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지금은 포도가 캠벨 종류가 많은데 저건 돈도 안 되고 수량도 얼마 안 나와요. 그래서 저도 얼마 전에 샤인머스켓으로 품종 갈이를 했는데 올해 첫 수확입니다.” 정 위원장의 말에는 설렘과 기대가 묻어났다.

“반룡사 여기가 예전에는 엄청난 절이었어요. 저 아래 마을하고 이 산 중턱, 저 옆까지 전부 절터였지요. 우리가 어릴 때는 이 옆에 주춧돌이 쭉 있었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산 여기저기에 부도 탑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아마 산 여기저기에 암자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산 전체가 거대한 절터였죠.”

정 위원장이 가리키는 곳을 어림잡아 보니 절의 규모가 상상이 되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어쨌든 우리 마을은 이 반룡사가 지켜 준다고 생각해요. 마을 뒤에 이렇게 좋은 절이 있으니 좋죠.”

내려오는 길에 막 익어가는 복숭아밭에 들러 복숭아를 두엇 따주었다. 붉은 복숭아가 용전 마을의 미래처럼 환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정 위원장처럼 고향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어 마을은 대를 이어 또 이어질 것이다.

[가볼만한 곳]
 

◇신라시대 사찰의 향기...반룡사

용전 마을 뒤 구룡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 사찰이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반룡사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곧바로 나타난다. 우리나라 3대 반룡사 중의 영남의 고찰이다. 한때는 마을의 전부와 구룡산 중턱까지 건물이 들어섰다고 하나 지금은 작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터 흔적 찾아가며 등산...왕재

마을 뒤 구룡산 왕재는 등산코스로도 알려진 곳이다.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라 불리는데 왕재에서 육동 마을을 굽어보는 낙조가 특히 아름답다. 구룡산에는 반룡사와 암자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눈 밝은 사람이라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절터의 흔적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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