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세력의 위험한 역사인식
집권세력의 위험한 역사인식
  • 승인 2020.08.11 21: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종호 달서구사회복지협의회장 월성종합사회복지관장
지난 달 19일, 국가보훈처장이 ‘이승만 전대통령 서거 55주년 추모식’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이승만 박사’로 호칭하여 큰 논란을 불러왔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 집권세력의 속내가 드러났다고 했다. 며칠 뒤 또 다른 장면. 7월 23일, 국회 통일부장관 인사청문회. 이인영 장관후보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데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국부는 김구가 되어야 한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이승만 정부는 괴뢰정권이냐”고 묻는 질문엔 분명한 답변 대신에 ‘이승만 괴뢰정권’에 대한 인식을 여러 의견중 하나로 이해한다고 에둘러 표현하였다. 참고로 이인영 장관은 과거 주사파 운동권이 장악하고 있던 전대협 조직의 1기 의장을 지낸 바 있다. 당시 주사파 운동권의 역사관에서 이승만 정권은 당연히 미제국주의의 괴뢰정권이었다.

이 논란의 본질은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통해 극단적으로 나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이다. 1945년 8·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지금의 논란이 현 집권세력과 그 핵심 인사들이 과거부터 꾸준히 제기해온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집권세력의 역사관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문제, 대북관계, 미중일 주변국과의 관계 등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 집권세력의 주류는 이른바 386운동권들이다. 지금은 50대가 되어 586세대라 불리지만 80년대 학번에 60년대 출생인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이다. 이들의 역사인식은 단언컨대 1979년에 초판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초해 있다. 이 책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과 함께 당시 학생운동권의 필수교양도서였다. 이 책은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자취방을 돌아다니면서 역사와 세계를 보는 그들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좌파 지식인들이 좌파적 관점에서 서술한 해방전후 시기의 역사해석은 외눈박이 반공교육만 받아왔던 20대 청년에겐 그야말로 지식과 교양의 신세계였을 것이다. 토론과 반론, 검증도 없이 그대로 학습되었고 운동권의 역사인식 바이블이 되어 버렸다. 기득권유지를 위한 미군정경제와 해방후 농지개혁,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잔재, 외세에 기댄 남한정부수립, 김구와 여운형의 자주통일 노선을 좌절시킨 이승만, 부패와 독재의 근원이 된 반민족적 사대주의자 득세. 이것이 이 책이 현 집권세력이 된 20대 운동권들에게 각인시킨 역사의 장면이다.

이렇게 각인된 근현대사 인식에 기초하여 당시 386운동권은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두고 노선이 갈라지기도 하였다. 반미자주화를 기치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이들이다. 이후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을 통해 반미노선을 분명히 하였고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한미 FTA 반대시위와 광우병 소동을 통해 대중동원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자유주의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은 이들에 의해서 이념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반미와 친북의 뿌리가 되게 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온 지 40년이 지났다. 대표 집필자 송건호는 작고하였으나 다른 집필자들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류와 원로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해방공간을 이해했던 수많은 당시 386운동권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청와대 참모진, 국회와 집권여당의 수뇌부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언론과 문화계, 학계, 심지어 많은 판검사들조차 학창시절 이들과 함께 이 책을 열독했던 이들이다.

걱정되는 것은 이 힘센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아직도 40년 전에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 저항의 논리로 받아들였던 거칠고 편향된 인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모습이다. 젊은 날의 생각에 대한 질문을 ‘사상검증’이라며 눈을 부라리거나 ‘이승만 괴뢰정부’에 우물거리며 답하는 태도를 보면 그리 짐작할 수밖에 없다. 열혈의 청년기에는 다소 경도된 이념에 심취할 수 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지고 책임 있는 입장이 되면서 더 진중해지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게 된다.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극단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난다. 지금의 586 집권자들을 보면 주먹만 세졌지 생각은 40년 전 운동권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어떤 때는 청와대가 그 시절 ‘총학생회’처럼 보인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세례 받은 50대 권력자들의 외골수 생각이 부패한 권력자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