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와 풀을 주제로 한 그림
국화·매화 등 출세·관직 상징
선비 뿐 아니라 백성들도 즐겨
보편적으로 괴석·화병 등 구성
돌 없애고 꽃을 패턴처럼 배치
작가 상상력 발휘해 그리기도
우리 민족은 꽃을 아름다움으로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꽃에 담긴 의미와 관련해서 사랑, 존경, 위문, 축하 등을 표현하는 마음의 징표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늘 쓰는 일상적 소품에도 꽃과 연관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화관, 꽃댕기, 꽃신, 꽃반지, 화문석, 화관 등등…. 종교적 측면에서도 꽃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바치는 육법 공양에도 그 첫 번째는 꽃이다. 풍류를 즐겼던 우리 조상들은 노래나 시문의 소재로도 꽃을 즐겨 사용하였다. 우리 조상들만 그러한가? 2천500년 전의 중국의 5대 경전인 <시경 (時經)>은 꽃과 풀에 대한 노래로 채워져 있다.
민화에도 많은 꽃이 등장한다. 확인되는 것만 약 40종이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꽃을 열거하자면, 모란, 해당화, 국화, 매화, 연꽃, 접시꽃, 능소화, 작약, 진달래, 장미 등이다.
원래 화훼도는 꽃이 있는 작은 꽃나무나 일년초의 풀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림이다. 즉 꽃과 풀을 그린 그림을 화훼도라고 한다. 화훼도는 돌과 수풀이 있는 땅 위에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계절의 꽃을 한 화면에 그린 것과 돌을 함께 그린 것, 병에 꽃을 꽂아 놓고 그린 것 등이 있다.
돌과 수풀이 있는 땅 위에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사계절의 꽃을 한 화면에 그리는 경우도 있다.
사계절의 꽃을 한곳에다 모아 그리고 사시군방(四時群芳)이라고 화제를 쓴다. 우리말로 제목을 붙이면 “사계절 꽃 그림”이 된다. 민화에는 특별한 제목이 없다. 그냥 꽃이 피는 풀을 흐드러지게 그려놓으면 화훼도(花卉圖)고, 꽃과 새를 그리면 ‘화조도’라고 하고, 까치와 호랑이를 그리면 ‘호작도(虎鵲圖)’ 즉 ‘까치호랑이 그림’이 되고 장수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그리면 ‘장생도’가 된다. 제목을 보면 그림을 금방 알 수 있고, 그림을 보면 제목을 유추할 수 있다.
어쨌든, 꽃은 향기의 상징이고, 향기는 군자의 향기를 말한다. 사계절의 꽃이면 일 년 내내 향기가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하니 은은한 꽃향기는 ‘인격의 완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계절의 아름다운 꽃을 그린 그림은 여성들의 방에도 어울렸지만, 실제는 의젓한 선비의 방에 병풍으로 둘려져 있었다.
으엥? 남자의 방에 꽃을? 여자 선비는 없었으니 당연히 남성 전용 꽃 그림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방에는 국화, 난꽃, 연꽃, 매화, 맨드라미꽃, 장미꽃, 접시꽃, 목련꽃 따위의 다양한 꽃 그림으로 장식했다. 이런 꽃은 모두 출세와 관직과 승진 따위와 관련된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꽃 그림은 화려하고 눈부실 만큼 아름답다. 꽃에 담긴 상징을 모른다고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유로 결국 화훼도는 선비들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화 화훼도 한점을 소개한다. 2018년 <조선시대 꽃 그림-민화, 현대를 만나다>에 전시되었된 그림인데 많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민화라고 하기에는 얼핏 추상화 같기도 하지만, 오직 꽃만을 연속무늬처럼 배치해 놓은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흔히 괴석, 화병 등으로 하단을 구성하고 줄기와 잎새와 꽃으로 메인 화면을 채운 화훼도의 일반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하단 부분을 완전히 생략하고 꽃을 연속무늬처럼 배치, 일정한 패턴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멋진 꽃문양 패턴을 만들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성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짜고짜 꽃을 늘어놓아 패턴을 이루게 한 것은 아닌 듯 하다. 나무와 가지는 지나치게 가늘고 허약하게 그려진 나머지 화려하고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꽃에 가려 존재감이 거의 없다. 화면에는 온통 꽃만 보이는 것이다. 흡사 연속 꽃무늬를 그려 넣은 포장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꽃의 모양도 사실적이지 않아 무슨 꽃을 그린 것인지 확실치 않다. 나팔꽃인 듯도 하고, 다른 꽃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비단 이 그림뿐만 아니라 민화 화훼도에서는 꽃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실력이 서툴러 제대로 그리지 못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애초부터 실제로 존재하는 꽃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꽃일 경우가 더 많다. 여기 보이는 꽃도 그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비교적 비슷한 꽃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다양한 색과 대단히 복잡하고, 심지어 심오할 만큼 최대한 장식성을 끌어올린 꽃의 모양에서는 사실성보다는 작가의 창의성을 더 많은 점수를 받아야 할 듯 하다. 파스텔 톤에 가까운 하늘색을 꽃의 메인 컬러로 정하고, 빨강과 노랑, 강렬한 원색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시각적으로도 대단히 우수하고 세련된 조화를 이끌어 냈다. 이쯤 되면, 이 그림의 작가는 이름 없는 무명 화가라고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지금의 그림에 대한 안목으로도 그저 신기하고 높은 미의식에 경외감이 든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긴 장마와 폭우에 온 나라가 힘들다. 흙탕물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도 꽃은 피어날 것이고, 시들어가는 꽃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은 또 그 다음이 있으니, 그렇게 다독여 줘야지. 시공(時空)을 떠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 그림으로 잠시나마 수해를 입은 모든 이에게 작은 힘으로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