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머리는 베지 않는다
고개 숙인 머리는 베지 않는다
  • 승인 2020.08.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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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포스터가 있다. 바로 ‘안전거리 유지’다. 특히 요금소를 들어설 때나 내릴 때면 사열하듯 쇼윈도 마네킹처럼 서 있는 것이 있다. ‘붙으면 사고’, ‘띄워야 안전’, ‘차간거리 유지’라는 문구다.

‘초보운전’을 등 뒤에 내 건 승용차 한 대가 수십 분째 추월차선을 달리고 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선 추월차선을 제외한 모든 길에 각자 정해진 차선이 있다. 최선 아니면 차선을 택하라는 듯, 추월차선은 바쁘면 바쁜 대로 여유가 있으면 그 또한 알아서 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배려의 차선이다.

비켜 주리라 여겼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저속이야말로 자신만의 속도인 양 고수하며 저속하게 달리고 있었다. 급기야 내 뒤를 따르던 누군가의 경적이 도로 위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사이키 조명처럼 비상등을 껐다 켰다 연속으로 눌러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보라 차선을 바꾸는 일이 서툴러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하려고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국도와는 달리 한 번 들어서면 유턴이 허락되지 않는 데다 직진만이 가능한 고속도로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비상깜빡이 한 번을 켜주지 않은 채 두 갈래 길 앞에서 전혀 머뭇거림 없이 요금소를 빠져나갔다. 그것으로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의 속도는 끝이 났었다. 나를 비롯한 뒤 따르던 차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제야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 정주행할 수 있었다.

‘고개 숙인 머리는 베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단 한 번이라도 비상깜빡이를 켜 주었다면 폭염처럼 들끓어 오르던 내 속의 화를 조금은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내내 잊히질 않았다.

서울 수도권 일대에 코로나 19가 연일 폭발적으로 부활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방역 당국의 지속적인 협조 요청에도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고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확진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사상 최장의 장마가 말복을 기점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또다시 폭염 특보가 발효된 상태다. 높은 습도와 열대야로 잠 설치는 날의 연속이다. 긴 장마와 폭염 그리고 부활한 코로나 19로 인한 우울감에 몸도 마음도 일상을 잃어버린 장(長), 마(魔), 속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공간의 근접학’에서 사람 간의 거리를 4가지로 나눈다.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기에 적합한 ‘공적인 거리’, 사회적 업무 수행에 필요한 ‘사회적 거리’, 시각과 후각, 촉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친밀한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이 중 부부나 연인 간의 거리는 ‘친밀한 거리’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먼 길을 동행하는 요령은 각자만의 공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새벽녘, 잠결에 앞집 개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연이어 옆집 사내의 고함이 따라 흐른다. ‘제발 잠 좀 자자, 참을 만큼 참았다’라며 빗발치듯 허공을 향해 폭언을 퍼부어 댄다. 옥상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것인지 들끓어 오르는 화가 골목마다 차고 넘쳐 창문을 흔들어 깨운다.

차간거리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일조권으로 인한 거리가 있고 글자와 글자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띄어쓰기가 있다.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거리두기’야 말해 뭣할까. 유턴이 없고 직진만이 가능한 고속도로 위에서처럼 생각 없이 무심코 잘못 내뱉은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되돌리기란 전혀 쉽지 않아 보인다.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에서 말하던 것을 떠올려 본다. ‘아 그대들은 함께 있으리라. 신의 말 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허나 그대들의 공존에는 거리를 두라. 천공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를 춤추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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