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선의 흐름 속 넘실대는 인간의 체취
투박한 선의 흐름 속 넘실대는 인간의 체취
  • 황인옥
  • 승인 2020.08.23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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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조각가의 길…박휘봉 작가
흙·돌·폐목…삶과 밀접한 재료 활용
인간의 성정과 운명 다채롭게 풀어내
2007년 작업 중 우연히 발견한 폐철근
주재료 신분 격상 거대해진 작품 규모
소박한 정서에 현대적인 세련미 부가
최근 매끈한 스테인레스로 작업 변화
끊임없이 표출되는 그의 실험정신 속
곳곳 배어난 휴머니즘 녹인 주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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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휘봉 작 ‘폐철근 수조’

 

박휘봉 선생님
 
매끈하고 미끈한 존재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지만, 투박하고 구수한 대상을 만나면 선뜻 손부터 내밀게 된다. 매끈함이 무결점 완전무결의 완결판이라면, 투박함은 친근한 인간미의 전형이다. 조각가 박휘봉의 작품에서 빗장을 야무지게 채웠던 마음을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힘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투박하고 소박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의 조각 면면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체취들로 넘실댄다.

박휘봉의 작품이 인간적이라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2013년 대구미술관 사색전, 2015 강정보 디아크 광장의 강정대구현대미술제, 2020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원로작가회고전, 2020년 대구봉산문화회관 ‘헬로! 컨템퍼러리 아트(Hello! Contemporary Art)’전에 출품된 그의 작품들이 포토존이 될 만큼 대중으로 북적였던 경험을 떠올리면 된다. 그들의 환호 저변에 휴머니즘이 자리했다.

박휘봉 작업에서 인간적인 정서는 곳곳에서 배어난다. 우선 재료가 인간적이다. 흙이나 돌, 폐철근, 폐목 등의 재료들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주로 우리네 삶과 밀접한 재료들이다. 주제 역시 ‘휴머니즘’이라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아름다운 인체의 선을 표현한 리듬,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점철된 인간의 욕망, 고통으로 다져진 인간의 삶, 자연의 섭리 등 인간이 타고난 성정이나 운명을 다양한 방식으로 엮어낸다. 형상은 또 어떠한가? 인체나 사람 얼굴, 꽃나무, 물이 흐르는 수조 등 인간의 형상이나 인간과 어우러지는 형상들이 박휘봉 특유의 투박함으로 드러난다.

‘휴머니즘’이라는 박휘봉 조각의 진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가장 최근에 선보인 두 점이다. 현재 대구문화예술회관 본관 입구 야외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사과-유혹’과 지난 15일까지 대구봉산문화회관 입구 야외광장에 설치되었던 ‘폐철근 수조’다.

작품 ‘사과-유혹’은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난 2015년 강정현대미술제에 폐철로 엮어 만든 사람 형상 앞에 함께 설치했던 작품인데, 빗물에 녹물이 쓸려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에 분홍색을 칠해 대구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에 설치했다. 사과 형태를 이루는 뼈대가 안과 겉의 경계를 나누기는 하지만 속을 비워 시원한 공간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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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휘봉 작 ‘사과-유혹’

작품 ‘사과-유혹’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폐철근을 지지대 없이 툭툭 이어 붙여 재료 자체가 가진 투박함을 오롯이 살려내는 반면에 매끈한 투명 유리로 한 입 베어 문 자리를 표현하고 사과 형태를 분홍으로 칠하면서 현대적인 세련미가 부가되었다. 특히 한 입 베어 문 자리에 거울효과와 흡사한 스테인레스로 마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애착심이 강하게 드러나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까지 끌어들이면서 세련미에 섹시미까지 더해졌다.

폐철근에 시각적인 감수성을 입혀 감각적인 포토존으로 거듭났지만, 작가가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묵직하다. 사과라는 소재 자체에 무거운 주제의식을 담았다. 작품 속 사과는 다름 아닌 아담과 이브가 따 먹은 금단의 열매다. 작가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발”이라고 했다.

그에게 욕망은 두 가지 차원으로 인식된다. 정당한 욕망과 부당한 욕구다. 그는 부당한 욕망을 고발한다. 작가에게 정당한 욕망은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긍정의 동력으로 작용하지만 부당한 욕구는 세상을 해롭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그가 “인간의 욕망이 도대체 어디까지 걸 것인가 묻고 싶었다. 욕구를 채우기 위해 거짓이 난무하고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며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사과를 따 먹는 순간을 통해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고 싶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다른 작품 ‘폐철근 수조’에는 콘크리트 건축물의 철거 잔해물인 폐철근을 연못이나 개울이 연상되는 물이 흐르는 수조에 수초처럼 설치했다. 철근이라는 광물질이 유연한 생명수인 물을 만나면서 수조 속이 동세(動勢)와 리듬감으로 넘실댄다. 도심의 한가운데서 수조로 만든 개울과 만난 방문객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폐철근 수조’는 어린시절 개울에서 본 흔들리는 물결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조형언어로 재현한 작품이다. “폐철근을 자르고 적당히 이어 눕혀놓았는데 그 모습에서 물의 흐름을 보았고, 그 느낌을 수조로 연결했다.” 사실 이 작품은 지난해 봉산문화회관 개인전에 첫 선을 보였고, 이번 전시에 확장된 버전으로 재구성해 설치했다.

‘폐철근 수조’를 통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가볍지 않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았다. “자연에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듯 우리도 자연의 질서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광물질인 철근이 사과나 수조 등의 부드러운 자연으로 예술적인 환원이 가능했던 것은 2007년 무렵이었다. 돌을 깎아 인물이나 꽃을 조각하는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잘라놓은 폐철근 가닥에서 추사 김정희의 난 줄기의 동세를 발견하고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작업의 재료로 끌어들였다. 추사는 말년에 ‘부작란도(不作蘭圖)’ 난 줄기를 거침없이 쭉 그어나가며 경지를 보여주었다.

“폐철근 선이 주는 강인함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개념부터 먼저 세운다. 그런 후에 설정한 개념에 부합하는 재료와 형상을 구상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박휘봉은 이 공식을 따른 역사가 없었다. 그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먼저 재료를 선택하고, 재료에 맞는 개념을 설정하고, 형상을 설계하는 수순을 따랐다. 2007년에 우연히 폐철근을 발견하고 작업의 재료로 끌어들이면서 ‘외유내강’, ‘인간의 욕망’, ‘자연의 섭리’ 등의 주제의식들을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구축해 간 것은 대표적이다.

처음 폐철근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하던 2007년 즈음에는 작품의 일부에만 표현되었다. 돌을 두드려 인물이나 자화상을 표현하는 방식에 철근을 가미했다. 이후 꽃으로 인물상을 표현하게 되면서 꽃의 줄기에 철근을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2016년부터 철근이 주재료로 신분이 격상하면서 철근가닥을 세우거나 철근으로 사과나 수조를 형상화하는 등 철근의 변주는 형상과 주제의식이라는 양대 산맥에서 확장 일로에 있다.

돌이켜보면 선(線)은 그의 작업을 이루는 뼈대가 되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작업을 선보였지만, 선(線)을 중심에 두는 태도는 한결같은 흐름으로 이어져왔다. 그의 첫 조각 작품인 ‘율’ 연작에서 인체의 선이 가진 리듬을 표현하고자 했고, 90년대 초중반에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선덕대왕신종(봉덕사 종)과 천마도, 벽화에 그린 비상하는 천인(天人)에서 영감을 받은 형상을 선(線)이 중심이 된 추상으로 녹여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도시인’ 연작을 발표했다. 특이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부릅뜬 눈동자를 표현한 인물상을 조각했다. 이후 눈동자 없이 강직한 도시인의 얼굴과 사람 좋은 모습을 한 작가의 자화상을 조각했다. 이후 자화상은 꽃의 형상으로 은유되기도 했다. 철근 작업으로 넘어오면서 인물상의 규모는 거대해졌고, 돌 대신 쇠가 재료로 변화하기도 했다.

40여년 조각가로 살면서 재료, 형상, 주제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무엇이든 작업의 재료가 될 수 있었고, 어떤 형상이든 그의 손길에서 예술혼으로 되살아났다. 90년대 전·후반 어느 평론가가 작가의 작품을 두고 “공예적”이라고 한 표현을 보고 충격을 받아 5년을 방황하며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에 치열한 자기점검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가장 깊었던 시기였다. 그가 “나는 그 어떤 작가들보다 양식이나 형식에 구애 없이 자유로움을 강조해왔다”고 했다.

박휘봉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국립부산사범대학 미술과에 진학하고, 교직에 몸담았지만 작업에 대한 갈증을 외면할 수 없어 40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진학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고, 동대학원 미술교육학 석사 졸업까지 학업은 이어졌다.

“공부를 계속해서 조각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의지가 있어 가능했던 것 같다.”

노년이 되면 현실에 안주하거나 남은 생을 정리하는 시간들로 채우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러나 내년이면 만 80세를 맞는 박휘봉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70대 후반에 폐철근에 예술적인 세련미를 가미하며 완성도를 높이는가 하면, 가장 최근에는 매끈한 스테인레스를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표출되는 그의 실험정신은 끝이없고, 청년 못지않은 젊은 감각은 후배 작가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가는 “자유로워서 거침없이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휴머니즘’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박휘봉의 ‘자유정신’의 결과였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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