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름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 승인 2020.09.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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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여름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호사스런 저 산자락을 베고 눕는 일
갈증에 울먹이던 저잣거리
두 발목 잡아끄는 수렁을 지나
연기처럼 구둘장을 벗어나는 일
연기처럼 긴 머리채 헤뜨리고서
벙어리 저 들녘을 내려다보는 일
피리새 원추리꽃 훨훨한 구름
비로소 나도
무념의 한 칸 마루 정자를 짓는 일
멀리 여름산
고매한 눈길을 쫓아가노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이향아=『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오른 후,『별들은 강으로 갔다』등 시집 23권.『불씨』등 16권의 수필집,『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의 문학이론서를 펴냄. 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함.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문학의 집· 서울> 이사.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해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여름 끄트머리, 여름 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물릴 수 없는 유혹의 푸른 손짓으로 꿈을 판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흰 구름 푸른 하늘은 울먹이는 갈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연기처럼 긴 머리채 헤뜨리고서 벙어리 저 들녘을 내려다보는 일은 무념을 믿는 이들을 끌어당기는 영원한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인지도 모른다. 피리새 원추리꽃 훨훨한 구름처럼 감미롭고 맑은 향기와 푸르름, 그 유혹과 낭만보다 더 멋진 조합이 있을까. 사람들은 간절히 구하면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구하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저잣거리 두 발목 잡아끄는 수렁의 시절을 만나도 한가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연기처럼 구둘장을 벗어났다.

멀리 여름산 고매한 눈길을 쫓아가는 것은 채움과 비움의 사이에서 비워둔 만큼 채울 수 있는 여지다. 그것이 어찌 호사스런 저 산자락뿐일까. 해안가 칠면초 붉은 가을도 푸르던 여름으로부터 왔다. 아침처럼 오던 것들을 다시 기약하기 위해선 보낼 줄 아는 것, 그러면 밤이 길어지는 걸 허락할 수 있다. 한 백년 좀 모자라게 나를 독대하게 해준 저 산에 저 바다에, 언젠가는 한 칸 마루 정자를 지을 것이다. 나처럼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도 때로는 찾아 올 수 있도록.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 직역하면 “자신이 원하는 작은 상(像)”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항상 이걸 추구하는데 만족을 못하니까 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으로, 평생 환상을 찾아 헤매는 이유에 대한 가장 간결한 메커니즘이다.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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