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로 엮은 실타래에 깃든 ‘영원불멸’
사유와 성찰로 엮은 실타래에 깃든 ‘영원불멸’
  • 황인옥
  • 승인 2020.09.09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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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갤러리 차계남展
반야심경 쓴 한지 자르고 꼬아
풀 바른 캔버스에 3번 덧입혀
점과 선으로 삶과 죽음 표현
입체→평면부조로 작품 전환
시간성의 상징도구로 실 사용
불교 가르침 ‘禪 ’ 선으로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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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계남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을갤러리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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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계남 작 무제.

반야심경과 금강경 등의 경전을 먹(墨)으로 쓴 후에 1㎝ 폭으로 잘라 손으로 꼬자 두꺼운 실타래로 둔갑한다. 불교의 숭고한 가르침이 조각조각 잘라져 분절되자 의미는 사라지고 흑색 점들이 흰색 여백 사이에서 새로운 존재감으로 드러난다. 작가 차계남이 주도한 한지와 서예의 변신이자, 의미에서 미술로의 전환이다.

먹으로 불교 경전을 쓴 한지를 잘라 꼰 것만으로도 예술적 얼개는 갖췄을 법 한데, 사실 여기까지는 꼬아놓은 한지 가닥으로 시간성을 가시화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본 작업에 노동과 사유의 중첩이 계속 이어진다. 본드와 풀을 배합해 만든 접착제를 캔버스 표면에 바르고 한지 가닥을 하나하나 붙여서 한 면이 채워지면 그 위에 다시 풀을 바르고 한지 가닥을 붙이게 된다. 이 과정이 무려 3회 반복된다. 3겹으로 층층이 쌓았지만 마지막으로 얹은 겹만 보여진다.

"지난 40년간 주제로 끌고왔던 '시간성'의 연장이자 보여지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혁파에 해당됩니다." 

평면의 한지를 꼬아서 부피감을 만들고, 그것을 3겹으로 쌓았으니 평면 부조다. 거대한 입체 작품 위주의 작업을 20여 년 간하고 변화에 대한 목마름이 차올랐을 때 새롭게 시도한 작업이다. 간단치 않은 노동과 사유의 흔적들을 작업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높은 완성도 갖췄지만 작품을 발표하기까지에는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들이 있었다. 첫 시도 후 작품으로 발표하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거대한 조형물을 바꾸어야 하는 숙명적인 시기가 왔고, 주저없이 변화를 받아들였어요.”

영원불멸의 시간성을 거대한 조형물 속에 구축했던 작가가 하루아침에 평면성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전환하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 내공이 탄탄한 작가일지라도 주제에 부합하는 새로운 물성을 찾고, 연구하고, 완성도를 갖추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받는다. 차 작가에게는 이 시간들이 유난히 가혹했다. 무려 6년을 울면서 고뇌하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6년 정도가 되니 제가 만족하는 수준의 작품이 나왔어요. 그제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작업의 변화는 ‘고수’와 ‘확장’ 그리고 ‘변화’라는 세 가지 축에서 진행됐다. 우선 ‘영원불멸의 시간성’이라는 주제는 그대로 고수된다. 먹으로 글씨를 쓴 후에 자르면 먹으로 표현된 형태는 순간이나 찰나 생명 탄생을 의미하는 점이 되고, 점들을 꼬아 만든 선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삶이 된다. 캔버스에 선들이 집적될수록 무한반복 되는 삶과 죽음의 시간들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간다.

색은 흑색에 흰색을 추가하며 확장세로 가닥을 잡았다. 한지에 먹으로 글씨를 쓰면서 흑색에 백색이 추가된다. “흑과 백의 조우를 위해 주저없이 서예를 시작했어요. 의미 중심인 서예가 추가되자 주제가 더욱 심화되었죠.” 사실 검정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다. 작가는 옷도 검정 옷만 고집하고 작품에서도 거대한 검은 공간을 구축했다.

작가가 “모든 색을 포용하는 검정은 내 운명의 색”이라고 운을 뗐다. “사람마다 기운이 맞는 색이 있다고 하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검정을 좋아했어요. 운명이어서 그랬을까요? 나중에 무속인이 검정이 제 운명의 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긍이 갔죠.”

주된 재료로 ‘실’을 여전히 고수하지만 사이잘삼에서 한지로 꼬아 만든 실로 변화했다. 거대 입체 작품과 마찬가지로 실을 계속 끌고 가되, 실의 물성 변화를 모색한 것. 작가는 시간성의 상징적 물성으로 작업 초기부터 실을 사용했다. 옛 선조들이 명줄을 실에 은유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매체의 변화는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다. 거대한 입체에서 평면 부조로 변화했다. 매체의 변화 이면에는 작품 규모가 주는 부담감이 있었다. “작품이 너무 큰 탓에 보관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왔어요. 평면으로 갈 수 밖에 없었죠.”

반전에서 감동은 배가 된다. 작가의 작품에도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다. 붓글씨를 쓴 후에 한지를 자르고, 꼬고, 붙이는 수행과 고행의 지난한 작업 과정을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다. 작품 과정이 치열할수록 완성작의 아우라는 고요하기 그지없다. 오직 그윽한 고요, 순수의 침묵만 남겨진다. “작업을 하면서 배어든 작가의 고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저나 관람객이 작품에서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기운을 받는 것이 제가 작품에서 원하는 것이죠.”

차계남 하면 변화와 집중의 균형감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작품을 오롯이 살아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전시공간을 고집하고, 무엇보다 작업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작가정신이 투철하다는 의미. 그리하여 “작가로서의 삶은 차계남의 삶 자체였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작업이 싫었던 적이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작가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작품을 만들다가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사유와 성찰, 영원불멸의 시간성을 자연적인 물성인 한지와 먹으로 녹여냈다. 화려한 조명보다 자연광 아래서 작품은 더욱 빛이 난다. 사유적이며 자연적인 작가의 작품에서 ‘선(禪)’적 아우라를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이번 전시제목이 ‘선(禪) 한 선(線)’인 이유다. ‘선(禪) 한 선(線)’을 주제로 한 차계남 개인전은 10월 10일까지 을 갤러리(대구시 남구 이천로134). 문의 053-474-488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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