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부족하다는 말은 틀렸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말은 틀렸다
  • 승인 2020.09.1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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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
대경영상의학과 원장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일제 강점기 시절 최고의 문필가였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유려한 문장과 단어 선택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그의 작품 중에 특이한 작품이 하나 있다. 1947년 발간된 ‘쏘련기행“이 바로 그것이다. 소련이라는 신세계를 방문하여 쓴 기행문으로, 보고 들은 것들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대목이 많아 시골노인의 첫 서울나들이에 발생하는 촌극을 보는 듯 잔잔한 재미가 적지 않다. 거기에 글을 풍성하게 포장해 준 상허의 놀라운 필력과 뛰어난 표현력은 덤이겠고. ‘쏘련기행’ 중 한 구절을 살펴보자.

‘문을 잡아 단여 주고 짐도 부려들이나 오직 사무적이고 굽신거림이 없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존재에 감촉됨이 없었다. 식당에도 남자 노인들인데 재빠르지 못한 것은 연령의 소치만이 아니다. 차를 가져오고도 앞에 놓인 설탕 그릇이 비었음을 이쪽에서 눈짓하기 전에는 먼저 알아내는 적이 적다. 이쪽의 지적으로 알았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서서히 무거운 걸음으로 가져온다. 미안했다는 것을 나타내려 덤빔으로써 도리어 이쪽을 미안해하는 일은 조금도 없다.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 깝신거리고 희똑거리어 도덕적으로 위선에 이르는 것은 고사하고 심리적으로 되려 마음을 못 놓게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 보담은, 차라리 이 사람들의 진실하기만 한 태도가 편하고 정이 든다. 호텔 밖에서 신 닦는 사람을 본 듯 하기에 나와 보았으나 시간이 늦어 가고 없다. 이런 것들이 과연 불편한 것인가? 불편하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호텔과 식당의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것인데, 단점조차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미화하고 있으니 소련판 용비어천가를 보는 듯하여 일견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빛바랜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아련하기도 하다.

그런데 의사 정원 확대를 두고 정부와 의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요즘, 정부의 주장을 살펴보다가 문득 이 ‘쏘련기행’이 떠올랐다. 의사는 부족하고 의대 정원 확대는 시급하다는 정부의 주장과, 소련을 찬양하기 위해 모든 것을 억지춘향식으로 견강부회하였던 상허의 글이 비슷하게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상허가 자신이 선택한 공산주의를 위해 소련의 모든 것을 칭찬하며 선전에 나섰듯이, 현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의대 정원 확대를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정책인 양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주장은 틀렸다. 해외 교포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의료 접근성 최강 대한민국에 의사가 부족하다는 주장은 필자가 들어본 헛소리 중 단연 으뜸이다. 눈을 돌려 주위 300미터 안에 병의원이 몇 개쯤 있는지 세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오늘 당장 배탈이라도 나서 진료를 받고 싶으면 100% 진료 받을 수 있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OECD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당장 진료가 시급한 질병이 생겨도 2명 중 1명만 2일 안에(당일 아니고 2일이다!) 진료를 받을 수 있고, 1명은 예약 후 몇 주 뒤에나 진료가 가능하다. 이런 사정은 다른 선진국들도 대동소이하다. 의사 부족의 근거로 정부가 자주 인용하는, OECD국가 중 인구1,000명당 의사 수 하위권이라는 통계는 가치가 없는 쓰레기 자료이다. 그야말로 앞뒤 말 다 자르고 한 부분만 인용해 발췌한 ‘악마의 편집’의 전형이다. OECD국가 중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1, 2위인 쿠바, 그리스의 의료환경이 말할 수 없이 열악함은 이 통계가 가치 없는 자료임을 명백하게 입증해 준다. 이런 자료를 내세워야 할 만큼, 의사가 부족하다는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한 모순 덩어리다.

시골에 의사가 부족하고 의사들이 기피하는 흉부외과, 소아외과 등 소위 ‘기피과’ 전문의 확충이 절실해서 의대 정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틀렸다. 시골에 의사가 가지 않는 것은 인구가 적고 경제력이 낮아 병의원 경영이 어렵기 때문이고, ‘기피과’에 지원이 부족한 것은 그 과를 전공하여 전문의가 되어도 취직할 자리가 적고 대우가 좋지 않기 때문이지 의사가 부족해서가 생긴 일이 아니다. 의료소외지역의 의료수가 등 현실적인 문제를 보완하여 병의원이 충분히 운영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기피과’의 근무 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의사 수를 늘려봐야 대도시에 피부, 성형, 비만 등 돈 벌기 쉬운 과목의 의사만 과잉으로 늘어날 뿐이다.

우리 선조들은 흔히 삶을 한 조각 구름에 비유하며 청빈한 삶을 꿈꾸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인 짧은 인생사, 헛되고 허무하니 탐욕을 경계하라 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부를 쌓기 위해서 아득바득 싸우고 편 가르고 다투고 미워할 필요가 있을까? 일개 범인일지라도 짧은 인생을 진지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소확행을 추구하는데, 180석의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현 정권은 무엇이 더 필요하여 이러한 무리수를 강행하는지 진정 궁금하다. 상허의 글에는 공산주의에 속아 넘어간 이상론자의 순수한 진심이 담겼을 수도 있어 일견 안타까운 동정심도 느껴지지만, 바른 의료를 외치는 의대생과 젊은 의사의 열정마저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해 버리는 정부의 태도에는 오로지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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