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넘실대는 경쾌한 무릉도원…갤러리 오모크, 왕열展
적색 넘실대는 경쾌한 무릉도원…갤러리 오모크, 왕열展
  • 황인옥
  • 승인 2020.09.13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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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이용’ 수묵화 정의 파괴
밝은색 물감 과감하게 사용
작가이자 인간을 馬로 은유
“평생 걷는 말에 휴식 선사”
왕열-개인작2
왕열 작 ‘Utopia-A meditation’

강렬한 레드나 청아한 블루 바탕 위에 산수화를 그렸다. 산수(山水)는 드러나거나 숨으며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든다. 골 깊은 첩첩산중에는 기러기가 평화롭게 날고, 땅에는 말들이 유유자적한다. 강렬한 색체 위에 산수를 그린 점, 유난히 긴 목이나 다리를 가진 말이나 기러기 등에서 초현실의 맛도 짙게 배어난다. 작가 왕유가 그리는 이상향, 즉 유토피아다.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갤러리 오모크에서 고즈넉하게 펼쳐지고 있다. 평면 회화에 담아낸 작가의 이상향 50여점이 관객 앞에 섰다.

작가 왕열은 유토피아를 그린다.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세계를 표현한다. 사실 동양화에서 유토피아, 즉 무릉도원은 익숙한 소재다. 일찍이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을 묘사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전기에 안견과 이하곤, 근대의 조석진, 변관식 등이 대표적이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을 졸업한 작가 왕열이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다가온다. 선조들이 그랬듯, 그 역시 현실이 주는 고통과 고뇌의 탈출구로 자신만의 지상낙원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했다.

그가 “내가 유토피아를 그리니까 사람들이 내가 행복한 작가인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현재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안의 공간으로 유토피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에요. 내가 현재 이르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소망하고 희망할 수는 있지 않겠어요? 그 세상이 제게는 유토피아예요.”

왕열 작가의 작업실에는 입체로 제작한 2m 높이의 말(馬)이 설치되어 있다. 말은 그의 유토피아 속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말(馬)’은 작가 자신에 대한 은유다. 그가 “말은 평생 뛰어야 하는 업보를 타고난 동물”이라며 “평생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나 자신이나 인간”이라고 했다. “고생한 말을 그림 속 이상향으로 데리고 와서 휴식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가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을 읽을 당시를 회상하며 무릎을 쳤다. 자신의 작품세계와 소설 속 스토리에서 유사성을 발견했다는 의미.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나누지만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냉엄한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는 것.

왕열은 이상세계에서 유유자적하며 지극한 행복에 이르는 해피엔딩으로 자신의 유토피아를 마무리 짓는 대신 이상세계에서 치유된 기운을 현실세계로 가져와 긍정의 역할로 활용하는, 결이 좀 다른 해피엔딩을 설정한다.

“행복해서 그리기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유토피아를 그려요. 그리면서 얻은 행복한 기운이 현실세계에서 활력으로 작용하면 그보다 좋은 순 없겠죠.”

그림의 정신적인 토대는 동양화지만 재료는 아크릴 물감이나 크레용, 캔버스(광목천) 등 서양적인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빨강과 파랑, 노랑 등 서양물감이 주는 강렬한 색채를 즐긴다. 한지 대신 광목천을 사용하는 것도 전통산수화의 입장에서 파격이다.

작가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한국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가는 작가로 이름이 실린 점”을 언급하며 동양화와 서양화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즐기는 자신의 화풍에 만족감을 표했다.

“밝고 경쾌한 수묵화를 그리는 것에 무겁고 칙칙한 것을 싫어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작용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의 수묵화가 나아갈 방향성을 고민한 결과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서양의 재료를 포용해서 완성한 산수화다. 십분 양보해서 재료와 결과적 측면에서 서양화라고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동양의 전통 산수화가 가지는 정신성과 표현법은 여전히 견지된다. 시대정신에 맞게 변화는 추구하되, 뿌리는 놓치지 않고 가겠다는 고집의 소산이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그의 산수화에는 기운생동, 운치, 여백의 미, 정신성, 일필휘지 즉발성 등의 전통 산수화의 멋이 짙게 배어있다.

“여백을 빨강이나 파랑 등의 색채로 기운을, 가족이나 말에 동양의 정신을, 스밈과 번짐이 주는 포용의 정신,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등 동양의 정신이나 가치를 계승하는 일은 변함없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가 서양의 물성과 동양 정신성의 만남에 대해 “전통의 확장”이라고 했다. “겸재 정선이 살던 시기에 아크릴 물감이 있었다면 겸재도 아크릴 물감을 썼을 것”이라며 “재료라는 물성은 부차적인 것이며, 핵심은 정신”임을 강조했다. “색을 쓰는 것이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고루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필요하면 갖다 쓰는 것이죠. 시대에 따라 물성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까요.”

한지의 스밈과 번짐의 효과를 서양의 물감과 캔버스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물성 연구는 필수다. 작가는 세탁해서 기름기를 제거한 마사천 뒷면에 한지를 붙여서 한지가 가지는 스밈과 번짐을 효과를 끌어들인다. 동서양 재료를 혼용해 전통 산수화의 현대화를 모색하는 이유에 대해 그가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문화이동”이라고 언급했다.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문화가 동양의 문화로 이동했다면 이제는 동양의 문화가 서양으로 이동할 차례라고 봅니다. 그 연장선으로 동양화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왕열의 ‘무릉도원을 거닐다’전은 10월 30일까지 갤러리 오모크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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