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꽃피우다
등, 꽃피우다
  • 승인 2020.09.14 21: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늦은 점심이다. 방바닥 한 귀퉁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쭉 뻗은 다리 위에 밥그릇을 얹는다. 돌덩이 같은 찬밥 한 덩어리 물에 만다. 풋고추 하날 집어 고추장에 푹 찍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혼자 먹을 바엔 차라리 굶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가 이내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물만밥 한술 떠 입 안 가득 밀어 넣어 본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허기진 마음이 더부룩함으로 빈속을 채운다. 오랜 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내남없이 살맛을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지친 일상위로 가을비가 조심스레 안긴다.

‘코로나 불루’를 넘어 ‘코로나 앵그리’란 신조어가 생겼다. 가슴 안에 켜켜이 시한폭탄 하나씩 품고 사는 사람들처럼 저마다 있는 데로 손발톱을 내 세운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라고 하는데 친구에게조차 불쑥 수화기를 들지 못한다. 나의 연민이 오히려 겨우 버티며 견뎌내고 있는 상대의 가슴에 등짐으로 더해질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딸내미가 효자손 하나를 내민다. 혼수품을 준비하며 가끔은 필요할 듯 해 장만했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었는데 낱개로는 살 수가 없어 묶음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며 말끝을 흐린다. 엄마 생각이 났다며 빙긋이 웃는다. 여러 가지 색깔들이 있었지만 그 중, 엄마가 좋아하는 연두색만을 골라 담았다고 한다.

효자손이 대나무나 노송나무로 된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건네준 것은 쇠로 만든 것이었다.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으며 거리조절까지 가능하다는 말을 비밀인 듯 일러준다. ‘시집보내고 난 후 둘만 남는 텅 빈 집안에서 서로 다투지 말고 등이나 쓱쓱 긁어주면서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하는 속정 깊은 딸내미의 바람이 읽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게 부디 자식에게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등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면 더위가 한결 덜해진다. 반대로 등이 시리면 추위가 몇 배로 더 크게 느껴진다. 어두운 골목을 들어설 때처럼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 땐 등골이 오싹해지듯 등에 몰린 짐의 무게를 덜어주면 비로서 온몸의 피로와 긴장이 풀린다. 거리를 조절한 후 등 깊숙이 밀어 넣어 긁어본다. 시원하긴 하지만 쇠가 몸에 닿는 느낌이 왠지 날 선 칼날 같다. ‘이젠 효자손까지 빌려야 하나’라는 생각에 코로나 19까지 더해져 천근만근 무거워진 마음이 가벼워지질 않는다.

코로나 19 이후 주로 계단을 이용하지만, 가끔 승강기를 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등을 비춰본다. 거울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는 등은 우리 몸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외로움을 가장 많이 타는 곳이 바로 등일 것만 같다. 부부가 백년해로를 해야 할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등이 가려울 때, 아무리 팔을 뒤로 젖혀도 시원하게 긁을 수가 없다. 닿을 듯 말 듯 한 아쉬움과 속상함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리라. 이런 낭패에 놓여 있을 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은 천만 구원병을 얻은 장수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의 삶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애써 떠밀지 않아도 자신만의 속도에 맞게 알아서 흘러갈 것이다. 오늘은 비록 힘들었어도 먼 훗날 지나고 보면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되새김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의 등을 손때가 묻어나도록 긁어주고 싶다. 무거운 짐을 등에 나눠 업고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눈앞의 어려움을 헤쳐 나 갈 수 있었으면.

창문 앞,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화분 속 나팔꽃 봉오리 위로 가을비가 밤새 토닥토닥 내린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선 등을 감싸주고 격려가 필요한 사람의 등을 토닥여주는 따스한 손길처럼, 내 등을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본다. ‘괜찮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비로써 등, 꽃이 핀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