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또 새 우물을 파야 하나?
[기고]또 새 우물을 파야 하나?
  • 승인 2020.09.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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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희대표이사
서정희 더불어복지재단 대표이사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익숙한 속담이다. 35년 전 나도 목이 너무 말라 내 손으로 우물을 팠다. 그동안 목을 좀 축이는가 싶었는데, 요즘 또 다시 새 우물을 파야 하나? 판다면 어떤 우물을 파야 하지? 고민이 많다.

1984년 말,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 보낸 10년간의 독일 생활을 뒤로 하고 귀국했다. ‘선진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독일과 비교할 때 당시 한국의 장애인복지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제대로 된 복지서비스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대는 수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구조적 변화만을 기다리고 있기엔 너무나 절박했고, 동병상련하는 장애인 부모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남편과 함께 용기를 내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후 사정을 아는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1997년에는 사회복지법인이라는 작지만 공신력을 갖춘 우물을 팔 수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우물을 완성했다. 나도 마시고, 내 아들도 마시고 200여명의 장애인과 그 가족들도 같이 마시는 우물이다. 거주시설도 있고, 이용시설은 여럿 있다.

2년 전부터 이 소중한 우물의 거주시설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52명의 중증장애인들이 상시 거주하면서 같이 마시고 있는 우물을 줄이거나 메우란다. ‘탈시설정책’ 때문이란다. 장애인거주시설은 시대에 뒤떨어진 형태의 우물이니 그 규모를 최소화 하거나 장기적으로는 아예 메우는 게 옳다는 정책이다. 장애인들도 거주시설에 격리·수용하지 말고 지역사회에 통합되어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야 그 자체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발전적 발상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말이다.

문제는 지역사회 통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중증장애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한번 와 보시라! 우리 거주시설의 거주장애인들 중 과연 지역사회에 통합되어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이 있는지 와서 보라! 통합이 가능한데 어느 부모가 무엇 때문에 자식을 거주시설에 묶어 두지 못해 안달이겠는가!

왜 이런 현실을 무시한 탈시설정책이 일률적·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을까? 적절한 지원만 주어지면 사회통합이 가능한 장애인, 똑똑한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과잉 반영된 결과다.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초중증장애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자신의 생활을 일부라도 스스로 디자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마당에 단체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는 게 애초에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누가 있어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주겠는가.

정책당국이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이들을 복지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 그저 암담할 뿐이다. 지금도 거주시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는데, 자신들의 사후 장애인 자식에게 닥칠 비참한 운명의 예감으로 피를 말리는 부모들이 수두룩한데 탈시설이라는 비현실적인 구호에만 집착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모든 정책이 그렇듯이 탈시설정책 역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언젠가는 합리적으로 조정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언제가 언제일까? 또 기다려야 하나?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당장 나타나고 있는 거주시설에 대한 정책적 홀대가 너무 아프다.

어차피 메우게 될 우물을 제대로 청소나 하겠는가! 거주시설은 모든 게 후순위다. 이래가지고서야 내가 죽은 뒤 혼자 남은 내 아들이 내가 파서 가꾸어 온 이 우물물을 나누어 마시면서 살아갈 수나 있으려나.. 그것 하나 바라보고 한 평생 나름대로 헌신해 왔는데, 또 새 우물을 파야하나? 어떤 우물을 파야하지? 이 나이에 팔수나 있으려나? 그저 난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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