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벌초
  • 승인 2020.09.2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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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청
부국장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秋分). 정확히는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분기점이다. 벼락이 사라지고 벌레는 땅 속으로 숨고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는 절기가 어느 사이 성큼 다가왔다. 오늘부턴 점차 밤이 길어질 것이고, 우리는 이로써 가을이 왔음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이다.

추분이나 추석, 가을의 당도를 알리는 여러 신호들이 있지만 나에게는 벌초 계획을 의논하는 것으로부터 올해 가을의 분위기는 시작됐다. 우리 집안의 조상님들께서 하필 경북 지역의 맨 끝자락 첩첩산골에 둥지를 튼 탓에 매년 벌초를 할 때면 온 문중이 갖은 고초(?)를 겪는다. 깊디깊은 고향 근처 높은 산의 골골에 산산이 흩어져 있는 조상님들의 산소는 두 손을 다 꼽아 헤아리기에 턱도 없을 만치 빼곡하다. 일가친척들이 고향에 옹기종기 모여 농사를 부치며 산길로 아래윗동네를 다니던 옛날에는 산 속 길도 꽤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산 속에 아예 길이 없다. 아주 어려서부터 이 산, 저 산을 놀이터 삼아 소를 치러 돌아다녀 산소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던 문중의 어르신들은 이젠 거의 돌아가시고 남은 어른들조차 당신의 몸조차 스스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노쇠해 지시니 타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후손들은 벌초 할 산소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도 엄청난 일이 됐다.

매 년 벌초 때면 우리 집안은 한 패에 예닐곱 명씩 세 패로 나눠 각자 벌초에 임한다. 각각 나뉜 세 패도 하루 만에 벌초를 끝내기엔 양이 많아 보통 두 세 차례 나눠 벌초를 한다. 우리집과 사촌네가 한 패고, 육촌 식구들이 또 한 패다. 그리고 팔촌 형제들이 나머지 한 패로 나뉘어 각자 조상 산소 벌초에 나선다. 따지고 보면 같은 조상인데, 우리 산소 곁에 있는 다른 패의 조상 산소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그 산소도 벌초를 하는 식으로 벌초에 나서면 벌초 날 돌보게 되는 산소가 얼추 열대여섯 기는 된다. 사촌 둘과 우리 형제, 우리 집안의 장손인 조카 형제까지 여섯 명이 하루 만에 이 산소들을 모두 정돈하고 나면 그 날 우리들은 모두 파곤죽이 된다. 길도 없는 산에서 억센 풀과 싸우며 위치도 아리송한 산소들을 일일이 찾아 헤메는 일부터 고행도 그런 고행이 없다. 어려서 도시로 나와 농사일 한 번 해보지 못한 조카나 우리들에게 예초기를 다루는 일이나 낫질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벌초 날이 다가오면 마치 전쟁을 앞 둔 병사들 마냥 전운까지 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을 앞두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장손인 큰 조카에게서 ‘올해는 벌초를 하지 말자’는 연락이 왔다. “코로나19 탓에 나라에서 가급적이면 성묘나 고향 찾기를 자제해 달라고 하는데, 서울 부산 대구 포항 인천 등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이 모두 다 모여 벌초를 하는 게 좀 그렇지 않느냐”는 거였다. 갑론을박 끝에 결론은 올해는 벌초 대행을 하기로 했지만, 조상 산소 벌초를 놓고 벌어진 여러 후손과 집안 어른들의 분분한 설전은 전쟁 못지않았다. 하지만 이틀이나 사흘에 걸쳐 벌초를 해야 했던 수많은 산소를 모두 다 대행으로 벌초를 하기는 벅찬데 어느 산소를 하고, 어느 산소를 올해 벌초 없이 묵히느냐를 두고 또 한 번의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올해는 추석 연휴에 정부가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지 않는다거나,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도 포장으로만 주문해 먹을 수 있다는 둥 코로나 정책에 관한 갖가지 얘기들이 나오면서 자연스레 정치 얘기로 화제가 모아지게 됐다. 이번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난 광복절 대체 휴일 탓이라거나, 정부가 방역 시기에 소비심리 확산에만 너무 치우쳐 전염병이 더 심해졌다느니 하는 그런 얘기들이 오가다가 검찰 개혁이니 공수처 얘기에 이해충돌 토론까지 벌어졌다. 통신비 지원에 대한 의견도 나오고 이 정부 들어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이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의견들도 마구 펼쳐졌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정의당 등 제정당이 모두 얘기 탁자에서 이래저래 요리가 됐다. 문중 구성원들이 벌초를 놓고 이러저러한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부딪히다 또 의견을 모으고 세대와 집안 간 이해에 따라 결론이 엎치락뒷치락 하는 모습이 정치와 꼭 닮았다.

벌초라는 작은 일이지만, 당연한 이치는 ‘조상을 잘 기리면서도 현실에 맞게 옛 전통의 모습을 차츰 바꾸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의 이치도 ‘나라의 주권과 번영, 국민의 안녕이 이 시대에 잘 맞는 방식으로 매 사안마다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걱정으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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