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걷어내고…풍경에 녹여낸 자화상
화장 걷어내고…풍경에 녹여낸 자화상
  • 황인옥
  • 승인 2020.09.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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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손갤러리 박경아 개인전
선·면 어우러진 연작 ‘Walk’
자연·추상 공존 가상의 공간
감정상태 은유적으로 표현
형상 윤곽보다 색의 변주 초점
물감 두껍게 쌓은 작품 ‘눈길’
변화된 화풍의 신작도 선봬
박경아작-walk
박경아 작 ‘walk’

박경아작thicket2-1
박경아 작 ‘thicket2’

빈 캔버스에 앞에 서면 거울 앞에 서는 느낌이었다. 거울이 외형을 비춘다면 캔버스는 내면을 비췄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감정 상태나 인식체계를 따라 가다보면 캔버스가 ‘숲’으로 변해 있었다. ‘숲’은 즉흥적인 선의 움직임과 생동감 넘치는 색채가 조화로운 추상의 형식을 따랐다. 작가 박경아의 작품 세계다.

우손갤러리에서 박경아 개인전이 개막했다. 전시는 올해 첫선을 보이는 ‘Walk’ 연작과 독일유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작업 전반을 소개하는 작품들로 구성했다. ‘숲’은 작가의 작업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녀에게 ‘숲’은 ‘인생’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반추상에서 추상으로의 화풍의 변화는 진행되었지만 인생길 굽이굽이 마다 회오리치는 감정상태나 인식체계를 작업의 내용으로 삼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는 숲을 표현한 그녀의 ‘풍경화’가 곧 ‘내적 자화상’인 까닭이다.

‘Walk’ 연작은 작년 하반기 무렵부터 새롭게 시작된 작품이다. ‘Walk’ 연작은 선과 면이 어우러져 구축한 자연과 추상을 넘나드는 가상의 공간이다. 색으로 구축한 추상의 공간에는 작가의 감정선들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작가의 내적 감정을 기반으로 한 작업들이기 때문. 작가는 “우연의 힘을 빌리고, 그러면서 차츰 드러나는 회화적 가상 공간”이라고 언급했다. “‘Walk’ 연작은 자연과 추상을 오가는 인식에서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보니 추상이지만 자연이나 풍경 이미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기도 하고 그와 유사한 이미지들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사실 박경아는 2017년 후반기부터 2019년까지 2년간 물감을 두껍게 중첩하는 작품으로 관심을 모았다. 의도보다 우연성이, 형상의 윤곽보다 겹겹이 올려지는 색의 변주가 회화의 중심을 장악했던 연작이다. 이 시기는 작가의 작업 인생에서 유일하게 감정보다 본능에 충실하던 때였다. 작품 제목까지도 의미가 아닌 외적 행위에 집중한 ‘겹’으로 지을 정도로 놀이처럼 물감을 가지고 놀았다.

또 다른 연작인 ‘어디든, 무엇이되든’ 시리즈는 그야말로 물감의 무덤. 건축현장에서 사용하는 시멘트 칼을 깡통물감통에 담궈 물감을 듬뿍 얹은 다음 캔버스에 올리고 펴 바르거나 쓸어내렸다. 철저하게 즉흥성으로 움직였지만 시멘트로 미장을 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누가 보면 물감 귀신이 붙었냐고 반문할 정도로 물감을 겹겹이 올리며 물감에 집착하던 시기였다.

“2018년에 서울의 어느 갤러리의 전속작가로 선정되면서 물감을 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어요.”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수학하면서 10여년간 독일에서 작품활동을 지속했다. 독일에 도착 직후 원서를 내자마자 운 좋게 독일 미대에 입학을 하고 지도교수로부터 좋은 평도 받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한 휴학생활은 심적인 부담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외향이 아닌 내면으로의 여행을 이끌었다. “과연 ‘나’ 다운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자아 찾기가 시작된 것.

이 시기의 작품은 반추상으로 표현됐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득한 숲의 형상을 그렸는데, 창의 내부와 외부는 커텐으로 가려지기 일쑤였다. “그 당시는 젊었고, 불안했고, 외로웠어요. 그러한 현실에 직면한 내적 심상들이 안과 밖을 나누는 창과 커텐으로 드러난 것 같아요.”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유화 물감에 기름을 듬뿍 섞어 수채화처럼 엷게 표현하거나, 종종 물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맛을 즐겼다. 작가는 “현실 밀착형 작업을 하던 시기”로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는 물감을 풍족하게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었고,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얇게 그리는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어요.”

사실 독일 유학시기의 상황은 궁핍한 경제여건 등에서 그녀의 편이 아니었지만 작가로서는 큰 수확을 올리는 시기였다. 평생 화두처럼 끌고 가야 할 작업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작가는 이때부터 자신의 감정상태나 인식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그녀 작업의 핵심 주제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귀국을 하고도 얼마간 커튼과 검은숲 시리즈를 이어서 그려갔다. 2012년 즈음, 이 시기를 작가는 ‘정체기’ 또는 ‘혼란기’로 언급했다. “회색빛 감정으로 일괄되는 그림에서 막연히 벗어나고 싶은 때”였다. 당시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정신적으로 고립무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홀가분했고, 외로움이 깔린 어두운 숲 대신에 꽃이나 풀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길고 긴 회색터널을 빠져나오는 시점이었다.

그 즈음에 한 갤러리에 전속이 되면서 물감에 대한 욕구가 충족될 수가 있었고, 얼마간 추상유희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2년 정도 지나자 회의가 밀려왔다. 두꺼운 물감층 밑에 덮어둔 밑바닥의 감정선들을 외면하는 것이 두꺼운 화장 속에 얼굴을 숨기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화장을 걷어내고 제 감정을 다시 들여다고보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감정선이 실린 작품들이 이번에 신작으로 나왔어요.” 전시는 11월 20일까지. 문의 053-427-7736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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