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대신 총 들고…독일 생화학자 바흐너, 전장서 잠든 사연
펜 대신 총 들고…독일 생화학자 바흐너, 전장서 잠든 사연
  • 김종현
  • 승인 2020.10.0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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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학자 ‘요한 아돌프 폰 베이어’
분해생성물 합성법 20년 연구
유기화학 전공 석사학위 받아
‘화학공업 기여’ 노벨화학상 수상
 

노벨상-학문갈라파고스
학문의 갈라파고스를 헤쳐나가며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림 이대영

 

대구, 노벨상을 품자 - (33) 운명아 비켜라! 나는 학문의 길을 간다

◇신(神)의 성스러운 색채(saint color)를 인간의 손으로 만듦

1905년 독일 화학자 요한 프리에드리히 빌헬름 아돌프 폰 베이어((Johann Friedrich Wilhelm Adolf von Baeyer, 1835~1917)에게 “유기염료 하이드로 방향족 화학물질에 관한 연구로 인해 화학과 화학공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프러시아 제국 베를린(Berlin, Prussia)에서 태어나 김나지움(Friedrich Wilhelm Gymnasium)에서 화학교사의 조수를 하면서 화학에 관심을 키웠다. 1853년에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해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으며,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병역근무를 마쳤다. 1856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복학해 로베르트 빌헬름 분젠(Robert Wilhelm Eberhard Bunsen,1811~1889) 교수로부터 정성분석, 정량분석 및 가스분석법을 익혔다. 프리드리히 아구스트 케쿨레(Friedrich August Kekule von Stradonitz, 1829~1896) 교수의 지도 아래 유기화학 전공을 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프리드리히 케쿨레 교수가 베를린대학교로 옮김에 따라 전학했고, 1858년 베를린대학 케쿨레 교수의 지도를 받아서 취득했다.

그 교수를 따라 다시 벨기에 헨트대학교(University of Ghent)로 가서 왕립아카데미(Berlin Gewerbeinstitut)에 강사를 맡으면서,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 1818~1892) 교수 밑에서 조교수를 역임하다가 1872년에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그(University of Strasbourg) 대학 교수로, 1875년 독일 뮌헨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의 주요연구는 1859년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와 같이 ‘스펙트럼 분석법(spectroscopic analysis)’에서 원소를 조사(照射)하는 방법, 남색색료인 인디고(indigo)를 분해, 분해생성물의 구조와 합성법을 연구했다. 이를 다시 배합해서 합성을 시도하고 화학구조를 모색하여 실험실 합성과 공업생산법을 20년 이상 끈질기게 작업했다. 당시 색료(色料)의 대부분은 돌가루(石粉), 흙가루(土粉) 혹은 식물로부터 얻는 색료(色料)였고 그 가운데 가장 비싸고 신성시했던 색료는 청색(blue)이었다.

특히 르네상스시대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가 교황청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의 천지창조(The Creation) 천정화를 그릴때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간 곳이 청색색료의 구입이었다. 터키산 비취원석(Turkish Jade Stone)에서 청색석분(靑色石粉)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원석의 가격은 황금보다 더 몇 십 배나 비쌌다. 예수 혹은 성모마리아의 옷은 푸른색으로, 그 성스러움은 ‘신만의 성스러운 색채(god-image saint color)’로 표현했다. 이런 천연남색의 주성분이었던 인디고(indigo)를 식물 쪽풀(plant dye indigo)에서 나오는 성분을 통해 인공적으로 합성하였기에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노벨상 선정위원회에서 1표차로 수상한 행운의 사나이

 

프랑스 화학자 ‘앙리 프레데릭 무아상’
불소 제조방법 등 오랜시간 몰두
자연계 다이아몬드 생성 원리 규명
1906년 노벨화학상 단독 수상 영예

1906년 유태인계 프랑스 화학자 앙리 페르디난드 프레데릭 무아상(Henri Ferdinand Frederic Moissan, 1852~1907)에게 “불소성분을 조사(照射)해 분리했으며, 전기로를 통한 과학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Paris, France)에서 태어나 파리외곽 소도시 모(Meaux)에서 지역실용고등학교를 마치고, 모대학(College de Meaux)에서 수학하다가 파리대학교(University of Paris)으로 전학해 화학을 전공했다. 1874년 그의 첫 과학논문인 ‘식물의 이산화탄소와 산소대사에 대하여(about carbon dioxide and oxygen metabolism in plants)’를 발표했다. 1880년 피에르 폴 데레인(Pierre Paul Deherain, 1830~1902) 교수의 지도로 ‘시아노겐과 시아누스를 형성하는 반응(On Cyanogen and its Reactions to Form Cyanures)’이라는 학위논문으로 파리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886년 파리약학대학교 독물학(toxicology) 교수를 맡았고, 1889년 파리대학교 무기화학 교수, 이어 1900년 파리 소르본대학 무기화학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연구는 초창기에는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에 몰두해서 연구를 하였고, 친구(Landrine)가 제공하는 실험실에서 분석을 맡았다. 1880년대 그는 실험실 하나 없이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불소화학(fluorine chemistry)에 대한 연구와 불소 제조방법에 몰두했다. 1886년 6월 26일 드디어 불소를 생성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French academy of science)는 3명의 화학자를 파견해 확인하고자 했으나 그는 재차 불소를 생성시키는 데 실패했다. ‘땅에 의해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因地而倒 因地而起)’는 사실에 착안해 1891년까지 불소화학에 재도전하고자 몰두했다. 1892년 자기의 이름을 딴 전기로(electric furnace)를 개발하여 자연계에서 얻기 어려운 금속을 제조했다. 1893년에 탄소에서 다이아몬드를 합성하고, 자연계에서 다이아몬드 생성원리를 규명했다. 1901년 수많은 불소화합물(fluorine compounds)을 찾아내었고, 바론(boron)과 인조다이아몬드(artificial diamonds)를 제조했다. 1906년 스웨덴 노벨재단의 노벨수상자선정위원회에서 심사 당시 “원자의 주기율표(periodic table)를 정리한 공로”로 추천되었던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와 각축했다. 그런데 “인류에 최대기여(the best benefit to humankind)” 항목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노벨화학상 수상자의 영광을 얻는 행운아가 되었다.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청룡열차를 타고

 

독일 생화학자 ‘에두아르트 바흐너’
‘발효화학 새 기원’ 1907년 노벨화학상
1차 세계대전 터져 군대 두번 자원입대
1917년 작전 중 사망자 명단에 올라

1907년 독일 생화학자 에두아르트 바흐너(Eduard Buchner, 1860~1917)에게 1896년 발효(fermentation)는 효모 내에 있는 효소작용에 의한 것이지 효모세포의 생리작용에 의한 것이 아님을 규명하여 발효화학(fermentation chemistry)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즉 “무세포의 발효현상 발견과 생화학적 연구에 대해” 단독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주었다.

그는 독일 뮌헨(Munich, German Confederation)에서 태어나 1878년 뮌헨공과대학(Technical University Munich)에 입학했으나 1882~1883년에 학업을 중단했다. 뮌헨의 한 통조림 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효문제에 고민을 했다.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주(洲)의 에를랑겐(Erlanfgen)에서 학우 오토 피셔(Otto Fisher)와 다시 공부하기로 하고 뮌헨대학에 돌아왔다. 1888년 테오도르 큐티우스(Geheimrat Julius Wilhelm Theodor Curtius, 1857~1928)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튀빙겐대학교(University of Tuebingen) 화학과 촉탁교수로 부임하면서 1896년 ‘효모 없는 알코올 발효’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898년 베를린 농학대학 교수가 되어 1907년 무세포 발효(cell-free fermentation)를 발견했으며, 1909년까지 그곳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00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동서부전선에 탄약수송담당관으로 종군했다. 190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고 1916년 3월에 뷔르츠부르크대학교(University of Wurzburg)로 복귀했다. 그런데 조국에 대한 충정일념으로 1917년 4월에 다시 자원입대했고, 루마니아 폭사니에 주둔하는 동안 마라세스티 전투에 참전해 1917년 8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마지막 고지탈환 작전의 사망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1897년 ‘효모세포가 없는 알코올 발효’, 1972년 ‘Eduard Buchner의 무세포 발효 발견의 인정(The reception of Eduard Buchner’s discovery of cell-free fermentation)’등이 남아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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