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크대를 깨다
씽크대를 깨다
  • 승인 2020.10.0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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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호

하수돗물 내려가는 배수구 물관 속으로

낡은 부엌 하나가 떠내려간다

허기를 담을 사기그릇과 찻잔을 깨끼발로 켜켜이 올리고

햇살은 바닥에 자연 도배를 하고 벽에 못질을 하면서

눈미소 짓던 한때 그런 기억이 있다

이음새의 결속은 일치를 이룰 때 효력의 힘이 보태지는 것

서랍과 문짝이 휘어지고 제멋대로 몸살이 난 걸

안간힘으로 기워 쓰던 것들

낡은 칸들이 절뚝거리며 나와 쓰러져 누웠다

그것들의 몸들은 부엌보다 정직하다

구석구석 흉터와 손때 묻은 흔적들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이

지지며 볶아대며 살아온 시간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생의 무늬였다

헐겁게 잠긴 수도꼭지

물방울 소리되어 똑똑 떨구고

이 빠진 머그컵에 고구마 푸른 넝쿨은 혼자 무성하다

나를 부수기 너무 버거워 씽크대 수리를 하며

씽크대가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필호= 1959년 경북 군위 출생.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삶과 문학 회원, 대구 작가회의 회원, 2017년 시집 <눈 속의 어린 눈>

<해설> 화자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상들을 가감 없이 펼쳐놓고 있다. 낡아 녹슬고 고장 난 싱크대를 수리하면서 느낀 화자의 소회가 남다르다.

비록 낡고 녹슬어도 정감이 가는 것은 화자 자신이 살아온 역경과 같은 것이기에 더욱 애착을 느낌이리라.

게다가 싱크대 주변의 사물들을 넌지시 짚어보는 여유의 여백이 함께 가미되어 살갑다. 시의 정감이 충만하다. -제왕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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