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손의 노래
덩굴손의 노래
  • 승인 2020.10.1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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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무섭게 짙어지는 담벼락이 초록 일색이다. 끝 간 데 없이 타고 오르는 담쟁이들의 열정, 지붕을 넘어 하늘에 가 닿으려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지쳐 보인다. 옆도 뒤도 발아래 한 번 내려다볼 틈도 숨 고를 새도 없이 위로만 올려다보며 걷고 또 걷는다. 스크럼을 짜며, 온몸으로 배밀이를 한다. 시멘트 바닥처럼 거칠고 건조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는 강행군이다.
화단 가장자리 담벼락 한 켠 겨우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위태롭다. 뙤약볕 아래 작렬하던 여름을 견디며 무수한 잎들과 가지를 키워내느라 훤히 드러나 있는 발목이 시리다. 메마르고 뒤틀린 뿌리에서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곧 가을이 깊어질 텐데. 여름을 견뎌온 것들이 열매를 맺는 계절이다.
담쟁이덩굴 한 그루는 무엇이든 감싸고 달라붙도록 프로그램된 수천 개의 초록색 덩굴손을 가졌다. 덩굴손에 닿은 것이 덩굴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거나 혹은 스스로 만족할만한 때를 만나기까지 버텨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잎사귀를 들춰보면 꼭 도마뱀을 닮은 수백 개의 발이 벽을 꽉 움켜쥐고 있는 듯 보인다. 꼬리가 잘려도 재생이 가능한 도마뱀처럼 담쟁이 역시 잘라내도 그때뿐, 초록에서 진록으로 색을 더하며 단단하고 깊게 벽을 타고 오르며 무성해진다. 내 꿈도 마찬가지다. 그만두고 싶을 때 없지 않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 아버지의 마지막 눈빛이 떠올라 포기할 수 없었다.
"서로 못 할 짓 하지 않도록 알아서 더는 타오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문 밖에서 누군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나가본다. 아래층 언니였다. 낫과 가위를 휘두르며 담쟁이를 자르거나 끊어내고 있었다. 일 층에 자라고 있던 것들은 이미 잘라낸 후였다. '뿌리를 뽑아내지 않는 한 내년 봄이면 또다시 자랄 텐데 제풀에 스스로 꺾이도록 이층은 그냥 두면 어떻겠나.'라는 나의 애타는 만류에도 언니는 가차 없이 담쟁이들을 끌어 내리고 만다.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담쟁이들의 등을 멀뚱히 바라보고 섰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을 애써 감추며. 위로만 오르려는 나의 꿈 또한 누군가는 저 담쟁이처럼 끌어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며 문득 되돌아본다. 저들도 살자고 온 목숨일 텐데….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들이 얼굴 마주 보며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입을 댄다고 한다. 흉물스럽다느니, 뿌리가 벽 속을 파고들어 담벼락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담을 타고 건너와 그들의 담벼락까지 해할 수도 있으니 잘라냈으면 하더라는 것이다.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꽃피우지도 열매 맺지도 못하는 것이 날 세운 칼처럼 이파리만 시퍼렇게 물오른 담쟁이로 인해 언젠가는 그녀가 사는 집 또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오랜 나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시인이 되는 것은 살아생전 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하다. 생의 반을 돌아 아직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나와 내 마음속 살아계신 아버지는 물론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연결해 주는 끈이다, 시는. 언제나 마지막 생일을 받아둔 마음으로 성냥을 그어 불을 피우듯 글을 쓴다. 한 발 한 발 꿈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지치고 부르튼 발, 틈새로 피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담쟁이처럼 오르고 오른다.
호프 자런은 말한다. '덩굴손에 흙이 닿으면 뿌리로 변하고, 바위가 닿으면 흡입컵을 만들어 단단히 붙는다. 또한 뭐든 필요한 것으로 변신하고, 자신의 엄청난 허세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든 다 한다.'라고.
얼마 전, 벽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의 끝을 보았다. 봄, 여름 지나 가을 초입, 담쟁이는 다시 옥상이라는 맨땅에 온몸을 누인 채 서성이고 있다. 위로만 보고 오르고 올랐던 내 맘속 끊임없는 질문들의 해답을 찾은 듯 메마르고 누렇게 잎이 바랜 달뜬 모습으로 바스락바스락 꿈틀대고 있었다.
삶이라는 무대 위,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만날 때가 있다. 급한 마음에 앞사람을 제치고 가거나 변화무쌍하게 차선을 바꾸며 끼어들기 해 본들 어쩌겠는가.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누구나 정지할 수밖에. '하여 친구여.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김민기의 노래 '봉우리'가 절창인 듯 귓전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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