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겼다
엄마가 이겼다
  • 승인 2020.10.1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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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엄마로서 아들의 잘못을 대처해야할까, 나로서 그 아이의 잘못을 대처해야 할까. 갈등이 생긴다.

가을이다. 바람이 갑자기 서늘해지고, 해는 점점 짧아졌다. 해는 아침에 늦게 뜨고, 저녁에 일찍 진다. 일조량이 부족해져서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홍희다. 가을이면 노란 국화꽃 한 다발을 화병에 꽂아두고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다. 시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찾아간다. 혼자서 말이다. 혼자만의 가을 여행은 여러명과 함께 하는 여행에 비해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다. ‘멍 때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이 있다. 홍희는 혼자서 ‘멍 때리기’여행을 자주 간다. 비움으로써 충만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연휴, 홍희는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정리해야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들과의 불통이 문제다. 걱정을 덜어놓으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는 자식걱정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아들이 엄마에게 큰 잘못을 했다. 아들의 잘못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고 오히려 사과하라고 했다. 어린 시절 힘들었던 부분을 자꾸 들춘다. 엄마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인가, 그래서 지금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 같다. 홍희는 올 한 해 아들이 하고자 하는대로 지켜보고 지원했다. 중요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고, 한 시간만 더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홍희의 바램의 전부였다.

홍희는 아이들을 위해서 힘든 결혼생활을 참고 살아왔다. 아이들이 어렸고, 홍희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혼자서 아이들을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결혼생활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잘 커주기만 한다면 그래도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보상받을 것 같았다. 오로지 그것 하나만으로 버텼다. 그런데 아이들은 홍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한 시간만 더 노력해주면 더는 바라지 않을 것인데 그것이 되지 않았다. 홍희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화가 났다. 화를 내는 엄마는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크게 화를 냈다. 어릴 때도 아빠에게 받은 화를 자신에게 풀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쉽게 잊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홍희와 아들도 그렇다. 홍희는 아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기억하고, 아들에게 준 상처는 잊었다. 아들도 엄마에게 준 상처는 잊고, 엄마에게서 상처입은 것만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그 말을 꺼낸다. 엄마보다 덩치도 커지고 ‘힘’이 세졌다고 생각하는 스무 살에 말이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수시로 그 때 ‘미안했다’라고 분명히 말햇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아들이 그 상처에 대한 분노를 깨닫기 전이어서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나보다. 엄마가 참고 참다가 아들에게 좀 큰소리로 말하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어릴 때 있었던 일을 들먹인다. 그 때의 억울함이 이제 와서 폭발되나보다.

20년의 시간을 같이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잘못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지난 날을 자꾸 들추어서 지금 화를 낸다고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다. 마음 속에, 기억 속에 있는 원망을 용서하고 앙금을 털어내야 자신의 마음과 기억이 가벼워지고 상대방을 새로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아들이 토해내는 ‘분노’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아니라, 이제야 엄마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하고 싶다. 엄마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냥 ‘나’로서는 이해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아들의 말과 행동.

며칠 동안 자기 혼자 버스를 타고 학원을 갔다. 월요일 출근 시간에 맞춰 혼자서 일어나고 준비한 아들은 태워주려면 태워달라는 말을 하며 엄마를 따라 나섰다. 그냥 같이 타고 갈 것인가? 사과의 말 한마디를 들어야 할까? 엄마로서도 나 자신으로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엄마한테 할 말 없니?” 한 마디를 했다. 건성으로라도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차 문을 열더니 뛰쳐나갔다. 아직은 화가 가라앉지 않았나보다. 아들의 화가 해소되고 엄마를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엄마로서의 홍희가 ‘나’로서의 홍희보다 더 너그러운 것 같다. ‘엄마’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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