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대구' 답사] “조선시대 대구의 모습 떠올릴 공간이 우리 주변 곳곳에”
['내 고장 대구' 답사] “조선시대 대구의 모습 떠올릴 공간이 우리 주변 곳곳에”
  • 남승현
  • 승인 2020.11.01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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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엔 6가지 성문 있었어
읍성 안으로 경상감영·달성관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 장군
망우당공원 만들어 업적 기려
내고장대구-징청각
경운중학교 학생들이 대구 경상감영공원에서 건축물을 둘러보고 있다. 전영호기자 riki17@idaegu.co.kr
 

대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중심역할을 하며 서울, 부산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도시로서 명성을 이어왔다.
하지만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구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에 대구신문은 경운중, 산격중, 교동중, 사대부중, 지산중, 심인중, 정화중 학생과 함께 10회에 걸쳐 대구의 역사와 숨결이 깃든 현장을 답사, 학생들이 대구를 바로 아는데 도움이 되고자한다.

(편집자주)

['내 고장 대구' 답사] 경운중학교 ‘주인공은 나야 나’팀


◇대구읍성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천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달서문·영남제일문·공북문의 4대문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서 2소문까지 여섯 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라는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했다.

읍성 안으로 북동쪽에는 경상도 전체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 달성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했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돼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으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조선 후기에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시장이었다.

◇경상감영공원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1601년 (선조34년) 경상감영이 있던 장소로서 대구도심 중앙에 위치한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 대구시에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최초 개장하였다. 이후 1997년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 전체를 재조성함과 아울러,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안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유형문화재 제1호)과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유형문화재 제2호), 그리고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29기) 등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선화당은 현재 남아있는 관아건물이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큰 가치를 지닌다.

◇망우당공원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공원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의 동쪽 관문에 세운 공원으로 면적은 약 7만 6천179㎡이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으로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과 ‘홍의장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장군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신출귀몰한 전략을 펴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여러 전투에서 붉은 복장에 백마를 탄 모습으로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공원 내에는 말을 타고 장검을 찬 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동상 가까이에 망우당 기념관을 지어 장군의 유품을 보관해 두고 있다. 망우당공원에 들어서면 하얀 성벽 위로 번듯한 누각 하나가 맨 먼저 눈에 띈다. 영남제일관이다. 영남제일관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대구읍성의 남문으로서,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된 것을 1980년에 옛 모습을 찾아 이곳에 중건해 놓았다. 대구독립운동의 대표적 유적지인 조양회관도 공원 내에 있다. 조양회관은 3.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회유되기 쉬운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혼을 심기 위해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던 공간으로 1922년 10월 서상일(제헌국회의원)이 중구 대신동에 건립한 것을 1984년 6월 9일 망우당공원 내에 이전 복원했다.

공원 사방으로는 백일홍, 목련, 은사시나무 등이 동산을 이루고, 뒤쪽 절벽 아래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영남제일관

대구 읍성은 1590년(선조23년)에 축성된 토성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파괴되어 그 후 140년간 성이 없었다가 1736년(영조12년) 4월 8일 채석을 시작하고, 4월 25일에 본 성채를 이룩해 6월 6일 여첩을 완공했다.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돌로 다시 쌓아 석성을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그 중 남문을 영남제일관이라 칭했다. 그 후 1870년 중수하여 성벽 위에 누각 4개를 세웠지만,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80년 지금의 영남제일관을 중건했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됐는데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대구 수성구 만촌동 현 위치로 그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참조했으나 규모는 원래의 것보다 더 크다.

남승현기자 namsh2c@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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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중학교 학생들이 대구읍성 조형물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전영호기자

 

"300년 전을 기억하고 기념할 공간 친숙하게 다가가요"

대구읍성 성벽 모형 눈길 끌어
동성로 명칭의 유래도 알게 돼

“300년 동안이나 대구시내 땅 속에 묻혀있다고요? 이 벽돌들은 ‘석생(石生)’ 3회차네!”

대구시내 바닥에 설치된 투명한 유리 막 너머로 쌓인 석재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경운중학교 학생들은 1736년 석성으로 쌓아올린 대구읍성의 흔적을 발아래 두며 지난 300여 년을 되돌아봤다. 제 나이와 석재의 나이를 비교해가면서다.

일렬로 면을 맞춰 정연하게 깔려 있는 기저부 판석들과 대구읍성의 성벽 모형이 학생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인 대구읍성은 1590년에 토성으로 조성됐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1736년에 다시 석성으로 쌓아졌다. 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4성로인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다.

학생들은 그간 숱하게 오갔던 ‘동성로’ 나들이 길을 떠올리며 “아픈 역사가 어떻게 이름 지어졌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이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없이 일본인들의 요구대로 읍성을 헐기 시작해 이듬해 4월 대구읍성을 완전히 철거하고 말았다. 이후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1909년 이른바 십자도로인 4성로를 개통한다.

“중구 동성로에 자주 놀러 나오면서 이곳저곳 엄청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대구읍성 성벽의 나머지 길들은 처음 봐요. 동성로가 왜 동성로인지도 이제 알았고요.”

읍성에 있던 4대문 터 표지석을 찾아나선 학생들은 중구 동성로 SC제일은행 대구지점 앞 동문(진동문), 서성로 삼정사우나 헬스 옆 서문(달서문), 남성로 단아안 미담한의원 옆 남문(영남제일관), 북성로 (주)제일인슈로 상회기둥 옆 북문(공북문)를 차례대로 돌아다녔다.

터만 남아있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방문한 곳은 동구에 있는 망우공원으로 4대문 중 유일하게 영남제일문이 복원돼 있다.

공원 내 하얀 성벽 위로 보이는 누각이 영남제일관인데, 조선시대에 축조한 대구읍성의 남문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80년 이곳에 옮겨 중건한 것이다.

영남제일관은 영남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이라는 뜻으로 대구읍성의 동서남북문 중 가장 중요하고 큰 문이다. 일제시대 읍성이 철거될 때 영남제일관을 비롯한 모든 문이 철거됐으나 1980년 옛 모습을 복원해 망우공원에 다시 세워졌다.

학생들은 성벽 구멍인 ‘치’의 서로 다른 경사도를 보며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다”며 신기해했다. 성벽을 기준으로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고, 안에서만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든 구조였다.

경상감영공원에서는 선화당과 징청각을 살펴보며 일대를 산책했다.

선화당은 경상감영의 정청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 34년 1601년에 이곳에 세워진 건물이고, 징청각은 경상도 관찰사의 처소로서 선조34년(1601)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정착하면서 선화당 등 여러 채의 건물과 함께 세워졌다.

건물 안을 기웃거리던 학생들은 경상도 관찰사를 비롯한 대구 판관 선정비를 살폈다.

학생들은 “조선시대 대구의 모습을 그릴만한 공간이 우리 주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날”이라며 “당시를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들이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한지연기자 jiyeon6@idaegu.co.kr

 

[‘주인공은 나야 나’팀 답사 소감] 몰랐던 대구 역사 찾아가 보고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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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중학교 학생들이 현장답사에 나서기 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전영호기자

오늘 내 고장 대구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신문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은 경험이라 생각해 선생님께 권유가 왔을 때 바로 신청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친한 친구들과 함께 신문에 나온다는 게 너무 셀레 오늘만 기다렸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와서 버스에 타고 안내를 받았다. 첫 번째로 대구읍성에 갔다.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다고 한다. 난 읍성이 뭔지도 몰랐고 대구에 이렇게 역사가 잘 묻어있는 거리는 처음 보았다. 높이가 5m나 한다고해서 놀랐다. 내가 아는 건 책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 본 높이가 15m 정도하는 걸 생각했는데 의외로 낮아서 놀랐고, 실제로 보니 높아서 놀랐다.

두 번째로는 경상감영공원에 갔다.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1601년 경상감영이 있던 장소로서 대구 도심 중앙에 위치한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 대구시에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최초 개장했다고 했다. 1601년이라고 하니까 엄청나게 까마득한 과거라고 생각했다. 풍경이 예쁘고 음악도 나와서 시원하게 벤치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가는듯했다.

세 번째로는 대구 근대역사관에 갔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얼핏 봐도 엄청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네 번째로는 망우당공원에 왔다. 숲과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기타연주를 듣고 ダ獵밥도 먹고 놀았다.

마지막으로 영남제일관에 왔다.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만촌동 현 위치로 그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참조하였으나 규모는 원래의 것보다 더크다고 한다. 지금도 큰데 더 컸다고 하니 놀랐다, 이곳 역시 풍경이 좋았고 대구 읍성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진짜 마지막으로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다음에 이런 기회가 온다면 또 가고 싶네요. 그리고 짐벌 및 분위기는 어떻게 후기를 작성해야 할 지 몰라서 그냥 다 적었어요^^ 감사합니다!

‘주인공은 나야 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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