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 제1조건 “과학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노벨상 수상 제1조건 “과학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 김종현
  • 승인 2020.11.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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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38)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야망
美 물리학자 ‘어비 랭무어’
어릴적부터 자연에 대한 큰 호기심
응결펌프·진공계도 발명 등 업적 남겨
‘계면화학 발견’ 1932년 노벨화학상
美 물리화학자 ‘헤럴드 유리’
교사 준비하다 더 큰 꿈에 대한 야망
1917년 화학전공으로 학사학위 취득
중수소 발견 공로 1934년 노벨화학상
노벨상-돋보기
호기심 돋보기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림 이대영

◇어릴 때 호기심 하나로 노벨화학상을 거머쥐다

1932년에 미국인 물리학자인 어비 랭무어(Irving Langmuir, 1881~1957)에게 “계면화학(surface chemistry)의 발견과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줬다. 그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어릴 때에 자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찰과 분석을 시작했다.

1898년 체스트넛 힐 아카데미에서 대학과정을 이수했음에도 콜롬비아광산학교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했고, 1903년 독일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월터 네른스트 교수와 프리드리히 돌레잘렉 교수의 지도를 받아 ‘냉각 중 용해된 가스의 부분 재조합에 대한 연구’ 학위논문으로 190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요연구업적은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뉴저지 호보켄에 소재한 스티븐슨기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1909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 스키넥터디에 있는 제너럴일렉트릭회사의 연구실(General Electric Research Laboratory, Schenectady, New York)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그곳에서 텅스텐 전구 연구, 진공관의 흡착기체에 대한 연구 및 가스전구를 발명했다. 1915년 고압정류관의 케노트론(kenotron)을 발명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금속표면의 단분자층 흡착(mono-layer adsorption)이란 개념을 도입해, 흡착 등온식(Langmuir adsorption isotherm)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1919년 ‘원자와 분자에서 전자의 배열’논문을 발표해 원자가 이론(theory of valence)에서 길버트 뉴턴 루이스(Gilbert Newton Lewis, 1875~1946)의 이론을 발전시켜 루이스-랭뮤어 원자가(Lewis-Langmuir Valence) 이론을 제창했다. 응결펌프 및 진공계도 발명했고, 인공강우를 비롯한 기상학연구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계면현상(interface phenomenon)을 연구했다는 공로로 1932년 단독수상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50년 제너럴 일렉트릭의 부소장으로 은퇴했다. 대표적 발명으로는 미국특허 1,180,159호인 ‘백열전구(Incandescent Electric Lamp)’, 1,251,388호 ‘엑스선 튜브의 제어방법 및 장치’ 등의 특허등록이 되어있다.

◇소박한 교사에서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야망을 키우다

1934년 미국의 물리화학자인 헤럴드 유리(Harold Clayton Urey, 1893~1981)가 중수(重水)를 분리시켜 수소의 동위원소인 중수소(重水素)를 발견했기에 ‘중수소 발견의 공로(for his discovery of heavy hydrogen)’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미국 인디애나 워커턴에서 태어나 교사자격을 얻고자 얼헴대학(Earlham College)에 들어갔으나, 보다 더 큰 꿈을 키워야 하겠다는 야망으로 1914년 몬태나대학에서 동물학을 배우다가 1917년 화학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1917년부터 1919년까지 필라델피아의 한 화학회사(Barrett Chemical Company)에서 TNT 제조 팀에서 근무했다. 1919년 모교인 몬태나대학의 강사를 맡았으나 학문에 대한 야욕을 잠재울 수 없어 1921년 캘리포니아대학교에 등록해 길버트 뉴턴 루이스(Gilbert Newton Lewis, 1875 ~1946)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23년 화학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스칸디나비아재단(American-Scandinavian Foundation) 지원을 받아 1923년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닐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교수를 만나 지도를 받았다. 귀국해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잠시 머물다가 콜롬비아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40년부터 맨해튼계획연구소(Institute for Nuclear Studies) 소장을 1945년까지 맡았다. 1945년부터는 시카고대학으로 옮겨 교수를 전임했다. 만년에는 모교인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중요연구실적은 1931년 중수(重水) 분리, 수소의 동위원소인 중수소(heavy hydrogen)의 발견으로 1934년 노벨화학상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이외 질소, 탄소, 황 등의 동위원소도 분리, 기계의 엔트로피, 흡수스펙트럼, 분자구조(molecular structure) 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 콜롬비아대학에서 우라늄(235U)과 중수소 농축방법과 붕소의 동위원소 분리방법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평화와 국제간 이해증인을 위한 원자 과학자로 살고자 방향전환을 했다.

연구논문은 200여 편이나 되어 있어 간추려본다면, 1923년 ‘이원자 및 다원자 가스의 열용량 및 엔트로피’, 1926년 ‘주기율표 제6·제7기의 이상에 대한 양자이론 설명’, 1929년 ‘할로겐을 함유한 불꽃의 연속스펙트럼(The continuous spectra of flames containing the halogens)’, 1930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방사성 핵 및 원자, 분자 및 양자의 규칙성(Regularities in radioactive nuclei and Atoms, Molecules and Quanta)’등을 집필해 오늘날 남아있다.

◇노벨상수상 명문가, 장녀는 물론 사위까지 노벨상을

1935년 프랑스 원자물리학자 부부인 프레데리크 졸이오퀴리(1900~1958)와 이렌 졸리오퀴리(1897~1956)에게 “새로운 방사성 원소의 합성을 인식시킨 공로”에 대해 노벨화학상을 주었다. 부부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과 191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의 사위와 맏딸이다.

먼저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대학교 물리화학대학(Ecole Superieure de Physique et de Chimie Industrielles de la Ville de Paris)에서 1925년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1925년 라듐연구소(Radium Institute)의 소장 마리에 퀴리(Marie Curie)의 조수로 연구를 했으며, 소장의 장녀 이렌 퀴리를 알게 되었다.

1926년 결혼하고 가족성(family surname)을 ‘졸리오퀴리(Joliot-Curie)’로 창성했다. 학업을 지속해 ‘방사능 동위원소의 전기화학(On the electrochemistry of radio-elements)’ 학위논문으로 과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파리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부인 이렌과 함께 알루미늄에 알파입자(aluminium with alpha particles)를 조사(照射)하는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1934년에 방사성 동위원조 제조에 성공했다.

1935년 ‘인공 방사선(artificial radioactivity) 원소의 연구’ 공적으로 부부가 공동수상자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37년부터 라듐연구소(Radium Institute)를 떠나 프랑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만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퍼그워시 회의 창립에 노력했고, 창설멤버로 세계평화평의회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한편 이렌 졸리오퀴리는 우리가 잘 아는 퀴리부인의 맏딸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1906년 아버지가 마차사고(horse-drawn wagon incident)로 세상을 떠났고, 폴란드(Poland)에서 수학교사인 외할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6년 소르본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대학(University of Paris)에서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2) 교수의 지도 아래 ‘폴로늄의 알파붕괴에 관한 연구(On The Alpha Decay of Polonium)’로 191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파리대학교(소르본대학) 부설 라듐연구소(Radium Institute) 소장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조수로 일했던 장 졸리오를 만났고, 1926년에 결혼을 했다.

남편과 공동연구로 1934년 인공 방사능을 발견했다. 1935년 남편과 함께(2인공동수상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1936년 내각에 입각해 과학연구장(Centre de recherche scientifique)에 취임, 1947년 마리아 퀴리의 후임으로 소르본대학 교수 및 소르본대학 부설 라듐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남편과 협력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평화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사능 연구로 인한 후유증인 백혈병(Leukemia)이 발병되어 1956년 3월 17일 꽃피는 봄날 스위스(Swiss)의 한적한 요양원에서 세상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글 = 정경은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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