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영원
그리운 영원
  • 승인 2020.11.1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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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안개는 산수화 화폭마다 젖어 있었지.
자운영 진분홍 논이랑을 걸어가면
지난겨울 폭설에 그랬을까,
물레방앗간 초가 이엉이 삭은 굴껍데기처럼 엎드려 있었지.
동네 늙은이 두엇 삽을 들고서 수런수런 멀어가는 빈들 끝에서
봄은 작년처럼 재작년처럼 언제나 옛날처럼 오고 있었지.
지평선을 비집고 가물가물 풀물을 번지면서 오고 있었지.

해마다 봄은 와도 나는 아직 어렸다.
나는 지닌 것이 없고, 나는 천지간에 모르는 것뿐이고,
그리고 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그러나 가당치 않게도 고독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고독해지기 시작하던 그 어느 날 미명을 잊지 못한다.
누가 내 눈에 포도주를 채웠는지
취기 같은 슬픔으로 움트던 고독.

나는 고독 때문에 그리움을 배웠다. 그리움은 나의 스승,
나는 그리움 때문에 나를 간수하였다. 그리움은 나의 파수꾼,
나는 그리움 때문에 목을 늘였다.
나는 그리움 때문에 살아남았다.
나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슬픔이겠거니, 별이겠거니,
영원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하였다.

정말 그런 것도 같아라, 그리움은 나의 영원이었다.
말해다오, 원하노니
우리들의 절정은 지금이 아니라고
흐르는 갈바람에 헹구어다가
눈부신 내일의 오정 부챗살 위에
회심의 낮달처럼 걸어 두었다고,
아직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산다고.

◇이향아 =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오른 후,『별들은 강으로 갔다』등 시집 23권.『불씨』등 16권의 수필집,『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의 문학이론서를 펴냄. 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함.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문학의 집· 서울> 이사.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해설> 장엄한 서사적 구도에서 그리운 영원을 펼쳐들고 있다. 이 詩 연별(1∼4연)로 오정의 부챗살 같은 눈으로 살펴보면 봄은 매년 옛날처럼 오고, 취기 같은 슬픔이 움트던 고독과 그리움을 배웠었으며, 영원한 나의 영혼을 기다리는 화자의 애틋한 외로운 고독이 고즈넉하다.

시(詩)를 정독할수록 정금빛처럼 반짝이는 시어들을 황홀한 가슴으로 바라본다. 읽어 흥복의 반가움에 젖는다. -제왕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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