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장불입
낙장불입
  • 승인 2020.11.2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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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한 번 떼어낸 배춧잎은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낙장불입(落張不入)이다.

시집을 보낸 딸네 집에 처음으로 다녀오던 차 안에서 남편의 첫마디는 “장인어른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 같아….”였다. 해 질 무렵 돌아오는 길, 동네시장을 찾았다. 옷깃을 여며도 선득선득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 수 없는 난전 한편, 배추겉잎을 떼어내고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다가가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할머니 겉잎을 왜 그렇게 다 떼어 내세요.”라고.

“요새 젊은 새댁이들은 속만 달라고 한다 아이가. 겉잎은 아예 다 떼 내고 줘야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 아이가?”라며 혀를 끌끌 차신다.

배추 전을 구워 먹을 요량으로 한 포기만 달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배추겉잎을 덤으로 포개 얹는다. 시래깃국이라도 끓여 먹으라며 조리법까지 오목조목 일러 주신다. 미어터질 것 같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썩이며 시장을 빠져나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릿한 슬픔과 후회가 늦가을 바람에 번갈아 섞여 뒤척인다.

입동을 기점으로 김칫독 바닥이 서서히 드러난다. 뚜껑을 열면 새파란 배추 겉잎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다. 김칫소가 빠져나가지 않게 외투처럼 속을 감싸 안고 있다. 겉잎은, 쓴맛과 짠맛을 넓은 품으로 받아내며 김치를 옹골차게 삭혔을 것이다. 척박하고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깊고 넉넉한 품성을 가진…. 저 넓은 품은 누구를 닮았을까.

가끔, 김칫소가 다 빠져나간 후 덩그러니 남은 겉잎을 보면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이맘때쯤이면 김치는 절정의 맛을 낸다. 묵은지다. 김치 한 포기 내어놓기가 무섭게 우리들은 속부터 팠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속만을 골라 아버지의 밥 위에 올려 주시곤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유난히 묵은지의 겉잎을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어머니는 항상 김치의 잎 부분만을 큼지막하게 따로 썰어 아버지 앞에 내놓았다. 시퍼런 배춧잎을 널찍하게 펼친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하얀 고봉밥 위에 올려 쌈을 싸고 보면 그 모양이 마치 복주머니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그 속에 생의 짠맛과 쓴맛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바라는 가장의 바람을 담아 겹겹 에워싼 것은 아니었을까.

달팽이 박사로 유명한 권오길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김치가 제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은 족히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생의 바람막이다, 아버지는. 묵은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엔 새로 담은 햇김치가 밥상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떼어낸 겉잎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듯 다신 아버지를 볼 수가 없다.

내가 품고 있던 속의 것들은 모두 이젠 곁을 떠나고 없다. 딸은 시집을, 아들은 직장으로 인해 멀리 객지로. 소금을 켜켜이 뿌릴 때만 해도 아등바등 살아 도망칠 듯하던 배추는 세월의 풍상에 농익어 간다. 이젠 내가 아이들에게 겉잎이 되어줄 차례가 아닌가 싶다. 풋내 나는 겉절이가 아닌 농익은 묵은지 같은 아버지, 속을 품어 안고 견뎌낸 껍데기처럼.

주말 오후, 김장을 끝낸 후 남편은 축 늘어진 배춧잎 같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목욕을 하러 갔다. 그동안 나는 어질러진 방안을 청소하고 배춧국을 끓인다. 볕살에 잘 익은 빨래를 걷어 속옷은 잘 개켜놓고 겉옷은 다리미질해 옷장에 켜켜이 챙겨 넣었다. 잠시 후,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들리고 풍경이 울린다. 현관으로 들어선 아들을 향해 한 마디 던진다. “아들! 네 껍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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