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포도주
물과 포도주
  • 승인 2020.11.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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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SQ힉스아카데미 대표, 경영학박사
며칠 전, 상담에 관심이 많은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사람은 과연 변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 때 대학 교수 한 분이 자신의 경험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독일에서 상담학 박사를 받은 현직 교수인데 우리는 상담학 전문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혼한 후에야 비로소 저는 포도주, 아내는 물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인생은 포도주와 같은 맛과 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와는 달리 아내는 그냥 물 같이 담백하게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 아내를 변화시키기 위해 저는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아내는 전혀 변화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신혼 초부터 갈등이 끊이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가 때때로 아내랑 라인강변을 걸으며 데이트를 하자고 해도 오히려 아내는 집에만 있고 싶어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당신 때문에 포도주 같은 내 인생이 맹물이 되어 버렸다’고 크게 화를 내곤 했답니다”

그는 말을 하는 도중, 틈틈이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의도와 노력은 오히려 그의 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런 갈등이 해소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제게 진지하게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물인가 포도주인가 라고 묻더군요. 그 질문이 제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어요. 인생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때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정말 물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부분을 담담히 채워주는 보석 같은 존재였지요. 그때부터 갈등이 사라졌어요. 저는 여전히 포도주 같은 감미로운 인생을 원하지만 물과 같은 아내의 삶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상담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의 솔직한 고백은 딱딱한 상담학 이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미숙함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성경에 물과 포도주에 대한 내용이 있더군요.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지요. 그것을 보며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 못해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려고 애를 썼으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인간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거나 포도주를 물로 바꿀 수 없어요. 물은 물대로 포도주는 포도주로 그냥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간혹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시기도 한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혀 새롭게 해석한 그의 말에 웃음과 박수로 공감을 표시했다. 나도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여전히 미숙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며 아쉬워했다. 돌아보니 결혼 한지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아직도 나는 아내와 자녀들이 이렇게 달라졌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 학교와 교회에서 보내었던 지난 세월도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몸부림친 시간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며 그들의 삶이 새삼 궁금하다. 그들은 과연 변했을까?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반긴다. 거실에 앉아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내가 갑자기 ‘우리 포도주 한 잔 할까요?’라고 제안한다. 얼마 전 선물로 받은 포도주와 제법 근사한 포도주 잔을 아내가 가져오고 나는 포도주를 잔에 부어 아내와 건배했다. 잔을 입에 대다가 문득 ‘당신, 집에서 화장을 조금만 하면 훨씬 더 예쁠 건데’라고 하려다가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삼켰다. 물은 물대로,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두자. 출근할 때는 화장을 한 채로, 집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그대로 있게 하자. 그래도 물같이 담백한 아내가 오늘 밤에 포도주를 마시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지내노라면 행여 어느 날, 곱게 화장한 아내가 붉은 포도주를 건네주며 건배를 제안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애써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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