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祿 가져오라’ 빌며…신선 곁 지키는 반려, 화폭에 담다
‘祿 가져오라’ 빌며…신선 곁 지키는 반려, 화폭에 담다
  • 채영택
  • 승인 2020.12.0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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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온의 민화이야기] 사슴
인간 욕망·정서 대변하는 동양화
장식 효과·주술적 의미 최우선시
매년 자라는 뿔은 장수·재생 연상
현세복락주의 가치로 서민에 인식
두 마리 ‘쌍록도’ 무리는 ‘백록도’
鹿·祿 독음 같아 ‘福祿’ 뜻하기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산타와 그를 끌고 다니는 사슴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케롤에도 있지 않은가.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이제 빨간 코 사슴의 시즌이 돌아오면서 우리 그림의 사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서양의 그림과 동양의 그림 차이점 중의 하나는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서양의 그림은 그림을 그릴 때 그려지는 대상이나 사물이 생긴 모양을 중요시하고,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다. 반면 동양의 그림에서는 사물이 지닌 정신을 먼저 생각한다. 생긴 모양보다는 그것이 지닌 의미를 우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그림을 사생(寫生)이라고 하고, 동양의 그림을 사의(寫意)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동양의 그림에는 소재 선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옛 그림에 그려진 동물들이 몇 가지 종류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를 풀어갈 사슴은 생태계에 실존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사슴 그림이 자연계의 한 단면을 표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그림의 사슴은 인간의 욕망과 미적 정서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매개체로 존재하고 있는듯하다.

사슴의 생태적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사슴은 나뭇가지처럼 생긴 뿔이 그 특징이다. 선조들은 사슴의 커다란 뿔을 나무의 상징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세계수(世界樹)=우주목(宇宙木)을 뜻한다. 그래서 아주 옛날 선사시대 암각화에도 사슴이 등장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긴 세월 동안 어로와 수렵을 하면서 고래 만큼이나 사슴이 바다와 육지의 연결, 신과 사람을 연결하는 상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동그라미 안이 사슴의 모양

이렇게 큰 뿔을 가진 사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하게 여겨졌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신선도(神仙圖)에는 큰 뿔을 가진 사슴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할리우드 영화의 ‘백설공주’의 변주 판, ‘반지의 제왕’ 후속편인 ‘호빗(뜻밖의 여정)‘이라는 영화에서도 큰 뿔을 가진 사슴이 나온다. 모두 신성한 존재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동물의 머리에 나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뿔에 달려 있는 것 자체가 신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사슴을 수성 노인(생명을 관장하는 신선)과 같이 그리기도 하고, 신령스러운 배경과 함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신라 시대 출(出)자 형태의 옆 부분을 장식하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은 우주 나무를 뜻하고 그 형상은 사슴뿔에서 나왔을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장생도에는 두루미, 사슴, 거북이가 나온다. 두루미는 하늘짐승, 사슴은 뭍짐승, 거북은 물짐승을 대표하는 상징적 동물이다. 장생도에는 두루미(학), 사슴, 거북이라는 세 종류의 동물이 나온다. 두루미는 날짐승을 대표하고 사슴은 뭍짐승을, 그리고 거북이는 물짐승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해와 하늘과 산, 구름, 바다(물), 소나무 따위의 자연물과 더불어 온 세상,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장생도는 누구나 척 보면 알 수 있는 상징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를 표현한 그림이지만 그 안에는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용이나 해태, 기린, 봉황 따위의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동물을 바탕으로 했다. 그들은 하늘과 인간, 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장생도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추구해야할 이상세계를 담은 그림이므로, 당연히 그 안의 동물들 또한 이상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중에 사슴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뿔이 하늘과 인간을 연결 시켜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생도 19~20세기 초. 견본채색 138cm X 157.8cm 국립중앙박물관.

장생도 10폭 병풍에서는 쌍으로 그려진 다양한 포즈의 쌍록도를 볼 수 있다.

동양에서의 사슴 그림은 사슴이 한 마리나 두 마리 혹은 여러 마리가 떼 지어 노는 장면을 그리는데 사슴이 두 마리인 경우에는 쌍록도(雙鹿圖), 여러 마리인 경우를 백록도(百鹿圖)라 부르는데 특히 한 마리만 그릴 때도 보통 흰 사슴(白鹿)을 그려 놓고 읽을 때 독음대로 백록도(百鹿圖)라고 읽어 백 마리의 사슴을 그린 그림과 같이 사슴이 지닌 복록(福祿) 등의 주술적 의미를 백배 더 하는 뜻을 지닌다.

사슴 그림은 불행과 질병을 막아주는 주력이 있고 사슴 록(鹿)과 복 록(祿)의 독음이 같아서 복록(福祿)을 의미한다. 또한 십장생 도상의 하나인 사슴은 그 뿔이 봄에 돋아나 자라서 굳었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봄에 다시 돋아나길 거듭함이 마치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운 달이 다시 차듯이 장수, 재생, 영생을 상징한다.

이제 민화에서의 사슴의 도상을 살펴보자. 십장생도류를 비롯해서, 군록도, 쌍록도, 송록도 등이 있고, 사슴이 신선과 함께 등장하는 신선도가 있다. 십장생도는 화려한 채색으로 산수 경관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제작 목적과 화의는 어디까지나 장생과 길상의 추구에 있다. 당초에는 궁중의 왕, 왕비 등 왕족의 사적 공간이나 궁궐의 중요 건물의 내부 장식용, 또는 외진연시 배설용으로 제작되었다.

십장생도가 사슴을 다른 장생 상징물들과 함께 그린 것이라면 쌍록도, 송록도 부류의 그림은 사슴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이다. 때로 해, 학 등이 화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구도상의 위치를 보면 사슴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임이 확인된다. 쌍록도는 민화의 특징 중 하나인 한 쌍 주의를 택하고 있다.
 

장생도 10폭 병풍 중 6폭. 38cm X 107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장생도 10폭 병풍 중 9폭. 38cm X 107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 쌍록도를 보면 상투적이긴 하지만 음양화합과 길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틀로서 중요한 조형적 가치를 지닌다. 때로 희조(喜鳥)로 알려진 까치 한 쌍이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도 볼 수 있는데, 소나무가 장수의 상징인 만큼 축수祝壽의 의미가 강조된 그림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크리스마스에 등장하는 루돌프를 민화 속으로 넣어 보자.
 

한국민화뮤지컬 '쌍록도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벤트' 포토존. 2019년 작.

한국 전통 그림인 민화 속 사슴과 서양 루돌프의 만남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K- 한류문화의 분위기속에는 신선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민화에 담긴 사슴그림은 수명장수 등의 현세복락주의적인 가치를 상징하고 있다. 수명이 특별히 긴 것도 아니고 천도처럼 신화에서 특별히 신령한 장생의 동물로 언급된 적도 없는 사슴이 서민들의 불로장생 기원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존재가 된 것은 신선의 옆을 지키는 반려동물로서 선계의 정령이라는 인식과 연결돼 있다. 사슴 그림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일정한 틀 속에 갇혀 있는 이유는 개성 표현보다는 어떤 목적을 위한 장식 효과나 주술적 의미와 가치를 우선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빨간 산타모자와 루돌프를 상징하는 민화 쌍록도의 사슴을 통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우리의 주변을 살피고, 끝나지 않은 질병을 이겨내는 힘을 내도록 애써봐야 겠다.

<박승온·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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