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대구 답사] “지역 의료 역사 되새기며 현재 의료진에 감사함 느껴”
[내 고장 대구 답사] “지역 의료 역사 되새기며 현재 의료진에 감사함 느껴”
  • 한지연
  • 승인 2020.12.0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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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5일_심인중76
대구 심인중학교 학생들이 대구 3·1운동길에서 김은숙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선국 사진작가

<내 고장 대구 답사> 심인중 ‘대구지킴이’팀

◇청라언덕&동산동 선교사주택

청라언덕은 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달성토성이 대구의 중심이었을 때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으로도 불린다. 챔니스주택, 스윗즈주택, 블레어주택 등 옛 선교사들이 생활했던 주택과 90계단, 대구 3.1만세운동길, 대구 최초의 서양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동무생각 노래비,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묘지인 은혜정원 등이 있다.

지금은 교육, 역사, 의료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는 동산 선교사주택은 1989년 6월 15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되었다. 1907년 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놓고 붉은 벽돌을 쌓은, 지역의 첫 번째 서양식 건물이다.

◇진골목

긴골목 지형 지칭한 ‘진골목’
해방 전 달성 서씨들 집성촌
100년 전  도심 골목거리 보존

진골목은 약전골목 인근 종로의 샛골목으로 ‘긴골목’이라는 뜻이다. 경상도 말씨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기원한다. 대구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구 대남한의원 사거리를 통과해 종로로 50m정도 들어서면 우측편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는 골목이다. 100여 년 전 대구 도심의 골목거리를 보존, 재구성한 곳으로 좁고 긴 골목의 지형을 지칭해 ‘진골목’이라 불리웠다.

해방 전까지 이 골목은 달성 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이 골목을 통하면 당시 군사, 행정로였던 종로를 통하지 않고도 감영, 중영까지 갈 수 있었다. 진골목은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으로는 경정(종로) → 남정(남일동) → 전정/상정(포정동)으로 이어졌었다. 해방 이후에도 재력가들과 기업인들의 거주지로 각광 받았다. 대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옥건물인 정소아과의원, 수많은 유명 시인의 모임 장소였던 미도다방, 대구화교협회 등이 남아있다.

◇대구근대역사관/경상감영공원

대구근대역사관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근대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돼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됐다. 2008년 도시공사가 이 건물을 사들여 대구시에 기증했으며,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에 문을 열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박물관에는 근대기 대구의 모습과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상설전시장과 기획전시실, 체험실, 문화강좌실 등을 갖추고 있다.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1601년(선조34) 경상감영이 있던 장소로서 대구도심 중앙에 위치한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 대구시에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최초 개장했다. 이후 1997년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 전체를 재조성함과 아울러,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상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유형문화재 제1호)과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유형문화재 제2호) 그리고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29기) 등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선화당은 현재 남아있는 관아건물이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큰 가치를 지닌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주심포 양식과 익공식의 절충형 공포를 이루고 있다.

◇북성로 공구골목

 

북성로 공구골목의 역사
1907년 대구 읍성 허문 자리
기계공업 발달로 집단상가 이뤄

북성로의 역사는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인 박중양이 1907년에 대구 읍성을 허물고 난 자리에 도로를 만들고 그 위치에 일본인 상점들이 입점하면서 시작되었다. 목욕탕, 재목소, 양복점, 조경회사, 백화점 등의 상업과 식당, 영화관 여관 등의 유흥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거리로 발전해 6.25 전쟁 이후까지 문화거리로 이어졌다. 주로 6.25 전쟁 때 피난 온 문인이나 예술가의 주요 근거지가 있었으며, 대한민국1호 음악 감상실인 녹향이 근처에 있다.

북성로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은 국산공구가 생산되지 않던 1947년경 지금의 인교동 달성공원 입구 골목에서 8.15 광복 이후 근처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폐공구들을 모아서 팔기 시작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기계공업의 발달로 관련업소가 계속 늘어나 집단상가를 이루며 철물을 다루는 상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지금의 공구골목이 형성되었다.

남승현기자 namsh2c@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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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심인중학교 학생들이 청라언덕길에서 대구 출생 박태준 작곡가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외국인 선교사의 역사를 알아가고 있다. 김선국 사진작가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 학생들 용기에 감탄

 

“100년 전 10대 또래 친구들
자신들 희생하며 거사 동참”

대구 진골목과 청라언덕길, 북성로 공구골목…….

대구를 이리저리 통하는 골목길은 좁다랗지만 넓은 문화·역사적 저변을 담고 있다.

9월 25일 심인중학교 학생들이 지역 근대문화의 길목 앞에 섰다. 첫 행선지는 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에서 유래된 청라언덕길이다.

‘챔니스’와 ‘스윗즈’ ‘블레어’ 등 옛 선교자의 이름이 붙여진 주택들이 눈길을 끌었다. 교육, 역사, 의료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는 동산 선교사주택(의료선교 박물관)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지금의 대구지역 의료체계를 떠올려 보았다.

학생들은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유행으로 지금 의료계에 대한 관심이 높다. 1차 대유행을 겪은 대구에서 의료선교의 역사를 듣게 되니 뜻 깊다”며 “대구지역의 의료 역사가 지나온 길을 되새기면서 의료진분들에 감사한 마음을 더욱 느꼈다”고 전했다.

대구 3·1운동길에서는 1919년 3월 8일 당시 비슷한 또래의 지역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나온 동산병원 언덕 소나무 숲을 지켜봤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폭발한 조선독립만세 운동의 경우 대구에서는 3월 8일 오후에 일어났다. 이날 거사에 동참키로 한 많은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길을 이용해 예정된 큰장안 강씨 소금집 앞으로 접근해 갔다.

동산병원 언덕 소나무 숲은 대구 3.1운동 성공을 위한 비밀 통로 구실을 했던 셈이다.

이어 대구 90계단(3.1만세운동길)을 오르내리던 심인중 학생들은 계단 방면에 전시된 1900년대 초의 대구사진과 3·1만세운동 당시의 사진들을 보며 생생하게 증언된 그날의 모습을 목격했다.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거사에 동참한 대구 학생들의 용기가 정말 대단해요. 지금 밟고 있는 땅 위를 100년 전쯤 같은 10대 또래 친구들이 독립을 위해 누볐던 거잖아요.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자문한 학생들은 각자만의 답변을 고민하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숙연한 분위기를 전환한 다음 골목은 명칭에서부터 경상도 말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진골목이다.

경상도 사투리 ‘질~다(길다)’에서 기원한 진골목에는 대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옥건물인 정소아과의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당시 달성 서씨 집안의 사랑채가 있던 미도다방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진골목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미도다방 앞에서 학생들도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래된 건물이라는 게 한 눈에 보인다”, “예전에 살았다면 우리도 미도다방에 자주 들렀던 대구지역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등이다.

북성로 공구골목에서는 철물을 다루는 상인들 모습이 있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었다. 또 북성로 역사전통문화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인 ‘모루’에 들러 기술 장인들의 기술과 예술가들의 협업, 기술 전승 등을 확인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대구에서 특정 영역의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지 몰랐다. 북성로 공구골목하면 그저 철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인 줄만 알았는데, 이 골목이 형성되기까지 장인들의 기술을 향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며 “다음번에는 중구 향촌동의 수제화골목을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지연기자 jiyeon6@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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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심인중학교 학생들이 청라언덕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선국 사진작가

 

“소홀히 여겼던 대구 역사를 다시 알게 된 소중한 경험”

“외국인 선교사가 살던 청라언덕
그분들의 희생 생각하니 감동”

◇현장 답사팀 소감

우리는 대구의 역사를 알고 탐구하기 위해 청라언덕, 대구근대역사관, 진골목, 경상감영공원, 대구 모루에 갔다.

청라언덕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해 정착하여 의료 기술을 널리 알려 천연두를 치료하는 등 많은 계기가 되었다.

열강에 비해 작았던 우리나라를 위해 멀리서까지 오면서 여기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중양이라는 사람이 대구의 성벽이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진골목에는 달성서씨들이 초기에 살던 동네였었다. 진골목이 긴골목의 경상도 사투리인 것을 알면 언제부터 이 골목이 살아 숨쉬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구 근대 역사관은 예전 조선식산은행의 이름이 바뀌었던 것이다. 건물의 구조가 예전 일제 강점기 때의 양식과 바뀐 것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 깔끔했다. 하지만 조선의 자금을 뺐기 위한 하나의 건물이고 국채보상운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인력거를 볼 수 있었으나 보존의 이유로 보지 못했던 것이 많이 아쉬웠다. 이 건물은 조선 총독부처럼 조선의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기니 하지만 그때의 아픈 역사를 미래의 후대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존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경상감영공원 축소모형으로 관풍루와 유형문화재 1호, 2호인 선화당과 징청각의 설명을 들었다.

관풍루는 달성공원으로 이전이 되어 있어 예전에 그저그랬던 달성공원 입구의 존재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선화당과 징천각을 제외한 관찰사는 워낙 목재이기 때문에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선화당과 징청각도 보존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었다. 대구 모루에서는 예전 북성로에서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작품이 다양했던 걸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은퇴하셨지만 그분들의 작품은 잊을 수가 없다. 한 때 대장장이의 망치나 모루에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어서 기뻤다. 평소 소홀히 여겼던 대구의 역사를 지금이라도 다시 알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심인중 ‘대구 지킴이’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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