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편지
[문화칼럼] 편지
  • 승인 2020.12.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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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이병률의 글을 읽다가 그의 시 ‘새벽의 단편’에 잠시 젖어본다. 그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 실린 시다. 오랜만에 집어든 시집이라 몇 번 씩 곱씹어야 시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데 새벽의 단편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느 긴 밤 /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았던 /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 좋은 시절이었다는 말은 / 그 오래된 시간을 부를 수도 / 다시금 사용할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 중략--- 편지지라는 말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빈 봉투처럼 / 돌아볼 단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 접지 않았으니 / 펼쳐야 할 것도 / 봉하지 않았으니 열어야 할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잊혀져버린 편지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시인 이병률의 글은 여행 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접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 가득한 그의 글만큼이나 가슴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의 시집은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몇 번 씩이나 읽고, 뚫어지게 쳐다봐야 겨우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의 탓이다. 함축적인 글보다는 쉽게 풀어 놓은 글을 찾아 읽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새벽의 단편은 나를 순식간에 수 십 년 전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편지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하고 아련한 그 세계로.

나의 이탈리아 유학생활 처음 1년은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기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주는 아픔은 작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래도 그런 가운데 위안이 되는 것은 주고받는 편지 이었다.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편지들을 가끔씩 읽게 된다. 잊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이 다시금 살아나는 시간이다. 이 메일이나 문자로는 가질 수 없는 가치다. 편지글을 쓸 때 썼다가 지운 채로 보낼 수 없다. 그러니 생각을 많이 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 그런 마음들이 서로에게 전달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편지다. 이제 편지를 쓴다는 것은 거의 사라져 버린 문화가 되었다.

일전에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에서 그가 일본의 아내에게 정갈히 써나간 편지들을 보았다. 우선은 처음으로 일본 문자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고받은 편지에서 부부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절절한 이중섭의 편지를 통하여 나는 이 위대한 화가의 내면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청춘들의 심금을 울리던 청마의 편지글. 수 십 년에 걸친 청마의 구애 편지는 훗날 그 사람에 의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한집으로 발간되었다. 청마의 작품보다는 이 서한집의 글이 더 인기였다고 생각한다.

작곡가 윤이상은 논란속의 인물이지만 세계적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한국음악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의 확립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악뿐만 아니라 통영 지방의 민속음악 등을 그의 작품에 녹여 매우 세련되고 매끈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1941년에 만든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는 노랫말이 아름다운 가곡 ‘편지’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윤이상이 유학차 홀로 떠난 독일에서 6년간 매주 한 두 차례 아내에게 쓴 편지들이 최근 서한집으로 출간 되었다. 다소 낯간지러운 제목(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이지만 이 편지들은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접한 음악과 당대의 예술가들과의 교류 등을 함께 기록했다. 이런 편지글을 통해서 자신의 시간을 정리해 나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편지는 이별의 시간에 특히 유용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소중한 인연들이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일이 많다. 아주 오랜만의 연락이라면, 마음 가볍게 쉬 말을 건넬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한 통의 편지가 그 사람과의 간극이나 시간의 흐름에 의한 거리를 메우기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이제는 미루지 말고 펜을 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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