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들의 어머니’ 영면 후 성인 반열 오르다
‘빈자들의 어머니’ 영면 후 성인 반열 오르다
  • 김종현
  • 승인 2020.12.3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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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44)지구촌 평화의 꽃밭에 한 송이 꽃으로
아일랜드 수녀원 출신 ‘마더 테레사’
어머니 영향에 어려서부터 신앙심 돈독
“난 주님의 몽당연필” 봉사활동 자처
가난한 이들과 인류 평화 위해 헌신
123개국 610개 고아원·학교 등 지원
 
노벨상-지구촌꽃밭
마더 테레사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지구촌 평화의 꽃밭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났다. 그림 이대영

오스만제국 코소보 주 스코페(Skopje, Kosovo Vilayet, Ottoman Empire)에서 태어나 아일랜드 수녀원에서 인도 캘커타(Kolkata, 1995년 Calcutta에서 개칭)로 파견되어 ‘하느님의 작은 몽당연필(god’s small pencil stub)’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난한 길거리의 사람들을 돌보아온 ‘살아있는 성자(a living saint)’ 매리 데레사 보아지우로(Mother Teresa, 1910~1997)가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아지우로(Anjeze Gonxhe Bojaxhiu)로,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거점도시 스코페에서 아르메니아 아버지와 알바니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치운동에 휘말려 출생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보살핌에 희소하게 가톨릭을 신봉했다. 영민하면서도 신앙심이 돈독했다. 12살에 인도 벵갈에 가서 수녀생활을 봤고 18세에 어머니가 수녀를 허락해서 아일랜드 로레타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 인도로 파견되어 영국계 백인들의 딸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3년간 기초교육과 영어를 익히고, 1929년에 인도로 파견되었고, 1931년 인도 다즐링으로 옮겨, 세례명 테레사를 받았다.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 캘커타 성(聖)마리아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강의했다. 1946년 9월 10일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안에서 ‘신의 목소리(god’s calling)’로 “안온한 로레타수녀회에서 뛰쳐나가, 거리에서 고통받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부르심 속의 소명(the call within the call)을 부여받았다. 소명을 받고서도 2년 세월을 질질 끌었다가 1948년 혈혈단신으로 거리에 나와서 소위 맨땅에 해딩하기(Hitting the ground)같은 무모한 짓을 했다.

당시 인도는 복잡한 상황으로 내부분열과 계급투쟁이 심하고 사람들의 질시와 반목으로 사회는 불안해졌다. 따라서 인도 길거리는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 흘렸다. 아무런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고 굶주림과 병마로 속수무책 죽어만 갔다. 그녀의 순수한 봉사를 선교수단으로 오해하고 무조건 적대시했다. 그녀가 소속했던 수녀회까지도 봉사활동을 오해하고 왜곡했다. 끝내 수녀복을 벗어던지고 불촉천인들의 흰색사리(white cotton sari)를 입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진정으로 섬기는 자는 밑바닥에서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에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결성, 1952년 8월 22일 무료호스피스인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혹은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를 설치했다. 1955년 9월 23일 어린이보호시설인 ‘출산의 집(Shishubhaban)’을 개설, 1958년 90명의 어린이의 생활공간을 마련했다. 1968년 한센병환자의 커뮤니티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마련, 1975년 ‘사랑의 선물(Prem Dan)’ 장기요양소를 만들었다. 드디어 가톨릭 교단과 교황도 지지를 천명했으며,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졌다. 언제나 했던 흰색사리와 샌들 차림으로 노벨시상식에서도 참여했으며, 시상식 만찬비용까지 아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한편, 미국에선 명성을 이용한 대규모 사기사건이 발생했고, 세계적인 폭력 혼란에도 오직 소극적인 봉사에만 전력을 쏟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표적인 악평으로는 ‘마더 테레사, 부자들의 성녀’와 1995년 크리스토퍼 에릭 허친스의 ‘선교의 위상: 마더 테레사의 이론과 실제’ 등 혹평도 부지기수였다. 45년간 타국에서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자신도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치료와 대우로 87세의 나이로 선종을 맞았다. 임종당시 123개국 610개의 선교단체와 상담소, 고아원 및 학교 등을 지원하고 있었다. ‘빈자의 최빈자를 위해 전심으로 봉사(wholehearted free service to the poorest of the poor)’했다는 성심으로 2016년 9월 4일 가톨릭 교황청에서 ‘캘커타의 성인 테레사(Saint Teresa of Calcutta)’로 시성(諡聖)했다.

◇예술가로 인권수호를 위해 군사독재에 저항

1980년 아르헨티나 평화주의 활동가로 커뮤니티 조직가, 화가, 작가이며 조각가였던 아돌프 페레스 에스키벨(Adolfo Perez Esquivel, 1931년생)에게 군사독재를 반대하고 인권을 수호한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시상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생활이 곤궁함에도 마누엘 벨그라노 미술학교를 다녔고, 라플라타국립대학(National University of La Plata)에서 그림그리기와 조각을 배웠다. 다양한 조각매체로 습작했기에 25년간 대학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르쳤다.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 기독교 평화주의자그룹에 가입해서 활약했다. 1976년 5월 쿠데타는 조지 비델라 장군(General Jorge Videla, 1925~2013)의 군사독재를 불려왔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인권을 방어하고자 ‘봉사, 평화와 정의재단(Service, Peace and Justice Foundation)’을 설립했고, 1974년에 공동으로 조직한 ‘라틴아메리카 인권비정부기구(Human Rights Non Governmental Organisation in Latin America)’와 ‘화해국제친목(International Fellowship of Reconciliation)’과도 상호 연계했다. 이를 통해 군사소탕전(Dirty War)의 희생자 가족을 도울 수 있었다. 1975년 브라질헌병에게 체포되어, 1976년 에콰도르에 수감되었다. 1977년 부에노스아레스에서 아르헨티나연방경찰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14개월간 고문을 당했다.

1976년부터 노벨평화상의 후보자에 몇 차례 지명되었다. 화가이며 조각가로 남긴 작품중 1992년 미국정복 500주년기념조각 ‘새 하늘과 새 땅(A new sky and a new land)’이 15개 역에 설치되었고, 스위스 난민위원회(UNHCR) 본부 난민기념비(Monument to Refugees), 에콰도르 대성당의 벽화(Cathedral of Riobamba), 바르셀로나의 간디광장(Gandhi Square, in Barcelo)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동상 등이 남아있다.

◇초등학교졸 학력 전기공이 민주화와 자유화의 선구자로

폴란드 노조지도자 ‘레흐 바웬사’
동유럽 최초 공인된 자유노조 설립
사회주의 탈피 민주화 물결 일으켜
정치 자유주의 기수로 자리매김
1990년 폴란드 대통령 당선되기도

폴란드 노조지도자이며 정치가였던 레흐 바웬사(1943년생)는 폴란드 브워츠와베크 포포보(Popovoe, Broughts Beck, Polska)에서 태어나 그다니스크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의 농사를 돕다가, 가출해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자동차기계공장에서 일했으며, 2년간 병역의무를 마쳤다. 1967년 7월 12일에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 전기공으로 입사했다. 1969년 다누타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1970년 식료품 가격인상 반대파업 당시 조선파업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고, 1976년 파업으로 해고되어 4년간 무일푼의 실업자로 생활을 하면서 ‘죽은 노동자의 기념탑’ 건립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그다니스크 지구연합파업위원회 의장으로 정부와 ‘정부노사합의’체결에 성공, 동유럽 최초로 공인된 자유노조(Free Trade Unions)를 설립했다.

1980년 9월 계엄령(martial law)으로 구류(拘留)에 처해져 11개월간 구금(拘禁)되었다가 1982년 11월 석방되어 조선소 복직은 허용되었으나 ‘연대운동(Solidarity movement)’은 합법화되지 않았다. 이런 민주화물결은 사회주의를 탈피하는 폴란드의 자유화물결(liberalization wave)로 번졌다. 1983년 7월 계엄령 해제, 그러나 바엔사와의 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부인이 대신 수상했다. 1987년에 프랑스어로 ‘희망의 길(Un Chemin d’Espoir)’을 파리에서 비밀리 출판했다. 노조지도자에서 폴란드 정치 자유주의 기수로 자리매김을 받았다. 1990년 12월 22일 총선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정상에서 전쟁(war at the top)’슬로건으로 노조자유화에 기여했으며, 경제성장 6%와 60%의 민영화를 추진했으나 성과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지 못했고, 1995년 12월 22일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의 저서로는 1991년 ‘자유로 향하는 길’, 1995년 ‘내가 하는 모든 것, 폴란드를 위해 한다’등이 남아있다.

글 = 정경은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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