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인 2020.12.3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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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논단
박동규 전 중리초교 교장
2020년을 보내면서 경주에 사는 아홉 살 손자와 대전에 살고 있는 여섯 살 손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처럼 볼펜을 잡고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썼지만 모양이 어설프고 삐뚤삐뚤했다.

편지의 내용은 손자(손녀)의 건강, 엄마 아빠의 안부,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 쓴 편지를 읽어보니 참으로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까닭에 아버지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안부였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잘못된 한자나 글 내용은 고쳐주었다. 그 기억이 새롭다.

공자가 멀리 고향을 다녀오는 제자를 길에서 만났다. 공자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어깨에 얹고는 “고향에 계시는 조부모님은 평안하시더냐?”하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제자의 대답을 들은 공자는 이번에는 지팡이를 어깨에서 내려 두 손으로 가지런히 앞에 짚으시고는 “그래, 부모님은 별고 없으시던가?”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고는 “집안 형제들도 별일 없고?”라고 말하고 돌아서면서 제자에게 “자네 처자식은 안녕하던가?”하고 물었다.

이렇듯 공자는 지팡이를 옮겨가면서 몸 움직임과 말로, 제자 가족의 위계를 밝혀가며 멀고 가까움을 변별하는 안부를 물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제자에 대하여 익히 알고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공자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고, 마흔에는 자신감이 생겨서 남의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쉰에는 학문하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알았으며, 예순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았고, 일흔에 하고 싶은 바를 쫓되 법도를 넘지 않았다. 공자의 길(道)이었다.

며칠 전 고령의 낙동강 둘레에 있는 개산의 ‘너울 길’을 걸었다. 그 길의 중간에 영조 때의 학자 박이곤이 지었다는 한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가파른 비탈바위를 기어올라 목을 구부려 용 굴을 바라보며/위태로운 지름길 비탈, 비탈길을 간다./모름지기 전전긍긍 조심하고 조심하는 뜻을 알아야 하리/세상에는 양의 창자같이 험한 비탈길도 많다는 것을.’(개산잔(開山棧))

‘잔(棧)’은 잔도(棧道)를 말한다. 잔도는 험한 비탈에 선반처럼 달아낸 사다리모양의 길을 말한다. 그 옛날 이 개산의 험한 길을 걷던 사람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면 배 한척 없는 낙동강이고, 앞으로 나아갈려니 절벽이다. 정말 난처한 지경에 이른다. ‘아포리아(Aporia)’이다. 해결이 곤란하거나 모순의 문제일 따름이지 불가능을 이야기한 말은 아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새로운 출발점이 됨을 내포한 말이다. 어느 누구든 삶이 양의 창자같이 험한 비탈길일 때가 있다. 이겨나가야 한다.

‘너울 길’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니 군데군데 흰모래가 쌓인 곳도 있었다. 굽이치는 강의 반대쪽 모래톱도 아름답다. 철새들이 무리지어 울음소리를 낸다.

김기림의 ‘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 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길이란 누군가가 불러줌을 암시한다. 어느 봄날 강가에 있는 버들개지의 손짓이 나를 이끌게 하고, 저녁놀이 타는 강가의 새들 푸덕임이 마음을 움직인다. 여름날 강 언덕 너머에 있는 얼룩빼기 황소의 울음소리가, 가을이면 황금들판과 울긋불긋한 산천이, 겨울이면 눈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함이 그리움을 만든다. 간절함, 애틋함은 희망이고 기다림이다.

2021년 소의 해 아침이 밝았다. 할머니는 무릎 벤 손자에게 ‘옛날 어흥! 호랑이가 나오는 험한 산길을 갈 때에는 항상 소를 몰고 갔었다. 호랑이를 만나면 소는 주인을 뒷다리 가운데 숨겨 보호하고 호랑이와는 싸워서 물리쳤다.’라고 의로운 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배우고 때때로 익혀라.’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가훈을 일러주었다. 그건 길이다. 잔인한 코로나19로 만날 기약 없는 손자 손녀에게 또 편지로나마 집안 전래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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