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를 미는 저녁이 지나간다
유모차를 미는 저녁이 지나간다
  • 승인 2021.01.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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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미련을 버려, 그렇지 않으면

더 슬퍼질 뿐이야

칭얼거리는 아기가 무엇을 보챘을까

젊은 아버지의 말이 빠르게 자라는 넝쿨처럼

저녁을 휘감고

대형마트 진열대의 발목을 낚아챈다

시간의 유모차를 밀며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도 오래 칭얼거렸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까 오래 슬펐을까

어이없어 웃다가 쓸쓸했을까

말의 분화구 하나가 밤하늘 달처럼 따라온다

시간을 팔아서 산 잡동사니를 싣고

귀가 붉은 저녁을 밀고

칭얼거림조차 제 몫이 아니어서, 지레

포기한 시간들로 이룩한

삶의 진열대에서

남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

유모차의 아기가 듣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그 말이 실은 나 들으라고 한 것 같아

미련과 슬픔 사이의 애증 관계라면

나도 알 만큼 알지만

저 말은 자라서 어떤 채찍이 될까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남에게 하는 날들이 있고

누군가의 입술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할 때가 있다

-시집 <장미키스>

◇최정란=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요산창작기금>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2019 최계락문학상 2020 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해설> 시간이 나를 키워오는 동안 말과의 대립은 시작되었다. 말은 나를 살찌우게도 하지만 나를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까 참기도 하지만 직접 하기도 그래서 돌려 말하기도 한다. 때론 내가 억눌러 참는 말을 다른 사람이 속 시원히 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자칫, 나이가 욕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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