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인간과 뗄 수 없는 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자연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인간과 뗄 수 없는 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 신경용
  • 승인 2021.02.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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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 방귀세
온실가스 배출량, 승용차 < 소
한마리 당 연간 4t 내뿜어
승용차 2.7t 보다 1.5배 많아
메탄가스 양은 85㎏ 이르러
에스토니아, 농가 방귀세 부가
덴마크·뉴질랜드도 도입 추진
사진2
소 한 마리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4톤에 달해 승용차 한 대가 내뿜는 2.7톤의 1.5배에 이른다. 메탄가스의 온실효과는 이산화탄소(CO₂)의 25배나 되기에 소 방귀와 트림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가속화 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출처=pixabay

한국 사람들은 소를 좋아한다. 농사일에 도움이 되어 좋아하고 재산 증식으로 좋아하고 상징성으로 좋아한다. 특히 소고기 한우도 참 좋아한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 이야기, 소가 뀌는 방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소가 방귀세를 낸다. 자연환경오염의 주범에 소도 있다고 하면 놀랄 수도 있지만 사실이다. 소의 방귀까지 신경써야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소 한 마리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4톤에 달해 승용차 한 대가 내뿜는 2.7톤의 1.5배에 이른다. 그리고 메탄가스의 온실효과는 이산화탄소(CO₂)의 25배나 되기에 소 방귀와 트림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육류를 좋아하고 소비도 증가하면서 지구온난화 속도 역시 빨라졌다. 이에 따라 실제로 2009년부터 에스토니아에서는 소를 키우는 축산농가에 방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덴마크와 뉴질랜드도 축산농가를 대상으로 방귀세법을 추진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해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마치 존재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밀접하게 유기적으로 결합한 것처럼 통일된 전체를 형성한다.

각 개체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도 각 삶의 존재와 차이에 대한 자율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합된 몸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들은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상호 의존성이 있어 하나의 체인이 위협받으면 그 영향은 전체 유기체로 퍼진다. 생태계 먹이사슬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역시 유기적 성질의 일부이다. 소 한 마리가 일 년 동안 내뿜는 메탄가스 양이 약 85 킬로그램이다. 이 양은 환경오염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그렇다고 소를 인간에서 분리할 수도 없다.

자연환경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실리적 접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환경에 적응해가는 진화 과정으로서 유기체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기체의 변화는 환경의 힘과 그것에 대응해 반응하는 자율적 변화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소 간 상호작용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는 곧 자연의 유기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자연에 대한 유기적 관점, 자율성과 유기성의 원칙을 가진 자연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성 개념은 자발적 운동, 과정, 성장, 변화의 원칙에 기초한다. 자연 보호 운동을 현장에서 행하는 활동가 관점에서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연 보호 운동가로서, 생명의 관점에서 자연관과 인간관을 확립하자는 뜻이다. 이는 광대하거나 포괄적이지 않다. 다소 우직하다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현실적이고 자체적이다. 자연환경의 본질적 가치를 나타내는 내재가치는 유기적 관점에서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패러다임 정립을 위한 제언이다.
 

실리적 접근법 찾아야
자연의 구성요소는 유기적 관계
하나가 영향받으면 전체로 퍼져
자연환경 파괴=절대악 인식 아래
전 지구적 새로운 패러다임 요구
자연·인간 공존의 세계관 필요

인류는 성장 발달의 여정이 진행될수록 역의 관계에서 도출되는 자연환경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자연생태계 파괴로 수많은 종이 멸종되어가고 있고, 인류의 존속 자체도 큰 위기에 놓여 있다. 이 위기는 기존 패러다임의 어떤 기술로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자연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는 자연관, 인간의 공존 세계관이 필요하다. 지금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인식 전환이 시작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자연관에 대한 인식 재정립은 ‘공존’의 세계관이다. 이것은 인류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자연의 사용을 통한 자연환경 정복과 자연환경 개발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 삶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자연환경을 훼손시키지 않고 파괴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자연환경보전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할 때 자연환경보전은 훼손과 파괴 측면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어느 쪽으로든 치우칠 수 있다. 이는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규정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은 도구적 사용에 효력을 발휘하는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공존의 세계관이 일반화되어야 한다. 공존의 세계관이 일반화될 때 비로소 자연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존재론적 유기체적 설정이 가능하다.

존재론적 설정을 통해 접근하는 데는 자연환경의 유기체적 가치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라야 공존의 세계관이 정립될 수 있다. 환경운동이 궁극적으로는 자연 보호 운동이고, 이것이 자연환경보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공존 개념으로서 자연환경보전의 철학적·이론적 근거는 유기체적 접근이 유일한 대안이다.

자연환경 파괴는 절대적 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생태계 파괴, 자연환경 파괴를 절대적 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과 인식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자연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우리는 책임감과 윤리 의식도 함께 가져야 한다. 자연과 인간을 공존의 세계관에 올려놓는 것은 자연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이다. 인간의 삶을 물질적 풍요로 축적해온 산업 과학 기술 문명이 가치관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인구 증가와 그것에 비례한 천연자원의 소비로 생태계는 더 심각하게 파괴될 테고, 자연 훼손과 황폐화는 가속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인류의 멸종이 머지않은 장래의 필연적 사실로 도래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자연과 인간이 융합되고 하나 되는 생명의 지향점을 찾는 자연관이 필요하다. 이는 인간 주도적, 혹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자연과 인간 정신의 융합을 생명의 지향점에서 찾는 것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두려움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즉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말한 슈바이처의 공존 사상은 자연에도 해당한다. 그가 말하는 생명에 대한 외경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함께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이 자연을 숭배하며 두려워하던 태곳적이 있었고, 이후 긴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을 향유 하고 만끽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부분을 부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원론적으로 다시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대상으로 자연이 인류 앞에 서 있다. 물론 자연보호단체와 자연환경보전단체가 호소하는 무분별한 산업 과학 기술 문명의 유해성, 오염된 대기, 생명을 위협하는 생태계 파괴, 인류 종말을 예견하는 자연 문제에 대한 논쟁이 사치스럽고 또 한없이 무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 자연 훼손, 환경오염은 인류가 대처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근원적인 문제라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일시적이거나 단회적이거나 한시적이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와 함께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본 철학이 인간의 관념 속에 구축되어야 하며,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 속에 자리해야 한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탄생부터 소멸까지, 훼손부터 복원까지 일련의 연계 과정에 놓여 있으며, 이는 곧 순환적이고 순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순환적이고 순차적인 흐름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 관계적이고 자율적이며 유능적이다. 유기체적 실현 경향성을 뜻하는 것이다. “숲이 우거지면 새가 날아오듯이” 말이다. 소풍 나온 고양이가 인간의 정원을 마치 자기 집인 양 뒹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우리 정원에는 새들이 나무와 숲을 찾아 날아든다. 사계절을 지키며 흙을 파고 물을 뿌리는 거칠어진 손마디에 새들은 지저귀는 노랫소리로 화답한다. 인생 여정의 마지막을 안식하고자 요양원을 찾은 어르신들은 새와 나무와 고양이와 숲, 이들이 어우러진 전경 속에서 하루의 느긋함을 만끽한다. 그리고 영양사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밥을 먹고 온종일 휴식과 안락으로 정원을 채워나간다. 인간의 분주한 발걸음을 잡아당겨 휴식이라는 안식을 선물하는 흐드러지게 핀 금잔화는 인간의 웃음에 기름을 붓는다. 하루하루가 힘에 겨워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려야 하는 어르신들의 긴 듯한 하루 여정을 평안으로 채워준다. 손길을 다하지 못한 죄송함이 발끝에 맺혀 있는 자녀들에게도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은 안도의 마음을 선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종을 유지하고자 자연을 찾는다. 그런데 이보다 선행적인 일은 인간이 자연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상황 속에 인간이 수용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행적으로 자연과 자연이 유기적 상보 작용을 하니 자연이 더욱 풍성해지고, 풍성해진 자연은 인간을 더욱 건강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생명성을 바탕으로 생태학적으로 봐야 한다. 인간도 생태계 일부로서 다른 생명체 및 자연환경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지속하는 자연유산이다. 자연환경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만큼, 인간과 자연의 조화 및 균형을 중시하는 관점을 일상으로 확대해나갈 때 공존의 세계관이 중시될 수 있다.
 

 

신경용<자연보호대구시달성군협의회 회장·금화복지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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