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오래된 추억 소환
[문화칼럼] 오래된 추억 소환
  • 승인 2021.02.1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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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최근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이 작가 10주기를 맞아 개정판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꽤 오래전 이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꼈던 슬픔이 되살아났다. 당시 나는 이 책에 완전한 감정이입을 한 것 같았다. 그 남자네 집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이은 박완서 자전적 소설의 완결판이라 한다. 마침 집에 두고도 미처 읽지 않았던 '그 많던 싱아---'를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싱아'는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스무 살까지 작가가 느끼고 겪었던 일에 대한 소설(기록?)이다. 일제말기, 광복 후 그리고 6.25를 관통하는 당시 사회상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개성인근 시골에서 지낸 가족들에 대한 추억이 너무나 섬세하다. 참으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자잘한 기억까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애정'때문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평소 마루오르내릴 때 잡고 쓰던 삼으로 꼰 줄. 돌아가신 후에도 방학 때 집을 찾아 그 줄을 어루만지면 심장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가슴에 진한 슬픔이 왔다" 이런 섬세하고 따뜻한 심성이 그를 닮은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 진학하며, 전쟁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의 한 가운데서 작가로서의 탄생을 알린다. 1.4후퇴 피난길에 뒤쳐져 처음 서울 살이 하던 곳, 현저동 꼭대기로 숨어들어 바라본 기괴한 풍경. 눈 아래 보이는 온 세상에 밥 짓는 연기하나 피어오르지 않는 철저한 고립. 사방 천지에 사람하나 없다는 공포에 다다랐을 때 문득 이것을 증언해야할 책무를 느꼈다. 좌익으로 몰려 당한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 한다. 그래야 벌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예감. 그건 글을 쓰는 것. 이런 예감으로 공포를 이겨 냈다고 한다. 감수성이 남달랐으나 순수했던 박완서. 그런 가운데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작가에게 이런 고난이 없었다면 소설가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을 해본다.

'싱아'에 앞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었다. 이 책 역시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사회상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싱아가 작가의 십 수 년에 걸친 이야기라면 '새'는 1968년, 진희의 12살 한해의 이야기다. 그리고 싱아 속의 '나'는 자존심은 세지만 순진하고 따뜻한 심성의 아이라면 '새'의 진희는 한 마디로 영악하다. 매우 똑똑하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전부 다 열지 않는다. 이를 작가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의 '보여 지는 나'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나'로 구분 짓는다. 진희는 이런 두 사람(?)사이에 언제나 있다.

이 두 책이 나의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시절 우리네 사는 모습을 너무나 실감나게 그렸기 때문이다. 싱아 속의 작가가 어린 시절 첫 서울 살이 할 때의 모습과 새의 선물의 진희가 보낸 시절은 내가 어린 날 지낸 풍경과 매우 닮았다. 두 작가가 그린, 한 울타리 속에 여러 집이 사는 모습은 나의 형편과 흡사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주부로만 살던 어머니는 덩그라니 큰 집과 넓은 집터를 활용해서 우리를 돌봤다. 본채를 두고 담벼락을 따라 하나씩 방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를 놓아 우리는 생활을 했다. 조금 씩 조금 씩 방을 늘려 나중에는 무려 13가구나 세를 놓았다. 그래서 화장실도 두 칸이나 되었지만 아침에는 언제나 붐볐다.

이런 환경 덕분에 나는 어린나이에도 제법 남자 몫을 해야만 했다.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시멘트 포대를 방바닥에 바른 후 생콩을 찧어 넣은 삼베 주머니를 여러 번 계속해서 문지르면 제법 그럴 듯한 장판지가 된다. 그리고 벽, 천장 등 도배도 종종 해야만 했다. 이런 일은 세를 놓은 방주인이 바뀔 때 마다 반복 되었다. 너른 마당에 이리저리 뻗어 있는 하수도 배관 청소도 내가 가끔씩 하는 일이었다. 다들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부부간의 거친 다툼도 간혹 있었다. 어린 나는 이런 것이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한 대문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분위기라 외로울 틈은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의 우리 집은 참 운치가 있었다. 담벼락을 따라 담쟁이 넝쿨이 우거지고 그 아래 간장 된장을 담은 장독이 가지런했다. 마당 한 가운데 화단이 있었고 구석에는 감나무와 그 아래 노천 목욕탕도 있었다. 그리고 대문 가까이 큰 오동나무가 있어 가을에는 동네사람들이 열매를 따러 많이들 오곤 했다. 무엇보다 정말 좋은 재목으로 지은 한옥은 아름다웠다. 어느 날 이집을 팔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잠에 들면 살던 집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싱아와 새의 선물을 읽고, 잊다시피 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마음 아프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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