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설날
  • 승인 2021.02.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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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터 장을 봐 왔다. 조기, 돔배기, 닭고기도 사고, 두부, 콩나물도 샀다. 떡을 하려고 쌀을 물에 불려 방앗간에도 갔다. 평소에는 먹을 거리를 잘 사지 않는 엄마는 부자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음식 준비를 하는 것이 힘들 법도 한데, 힘들어하기보다는 들떠 있는 것 같았다.

홍희는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하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설빔으로 옷을 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설음식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은데, 옷까지 사줄 형편은 안 되는 엄마는 올해도 설빔은 사주지 않았다. 새 옷은 커녕 홍희의 옷은 누군가가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기가 일쑤었다. 얼마전 고모가 다녀갔다. 세 명의 고모 중 둘째 고모는 커다란 보따리를 가지고 포항에서 왔다. 먼 길을 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보따리까지 들고 오느라 힘이 들었을텐데도 고모는 밝은 얼굴로 웃으면서 마당을 들어섰다.

고모가 큰 방으로 들어와 보따리를 펼치자 거기에서 옷이 나왔다. 양털같은 겉옷과 털 스웨터 몇 개, 바지가 있었다. 엄마는 홍희를 힐끗 쳐다보며 어떠냐는 눈짓을 보냈다. 홍희는 제일 좋아하는 고모가 건네주는 옷을 뿌리치지 못하고 웃어주었다. 입어보았다. 딱 맞다고 고모와 엄마는 좋아했다. 그것이 홍희의 설빔이 되었다. 홍희가 원하는 재질과 스타일의 옷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 옷을 입어야 했다.

설빔으로 새 옷을 사지 못해도 설날은 좋았다. 단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만은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였고, 찬 바람 대신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이 되면 도시로 나간 언니와 큰 오빠가 집으로 왔다. 큰집 사촌오빠들도 설날 아침 세배를 하러 왔다. 같이 제사도 지내고, 한 상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새로운 말들과 새로운 경험을 듣게 된다. 시골의 일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언니, 오빠들이 참 커 보였다. 아버지는 사촌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대도시에서 살아보지 않고도 어찌 그리 아는 게 많은지 신기할 정도였다. 늘 보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엄마도 제사 준비하느라 분주했지만 야무지게 음식을 차려냈다. 늘 밥상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젓가락으로 무엇을 집어야할지 몰라 허공에 떠 있던 것과 달리 젓가락을 바쁘게 했다. 엄마가 음식솜씨가 없다고 아버지는 늘 타박을 했고, 홍희도 엄마의 밥상이 먹을 것이 없어 늘 허전했는데 알고보니 음식재료가 없었던 것 뿐이었다. 재료만 있다면 충분히 맛있는 한 상을 차릴 수 있는 엄마였다.

설 전 날밤에는 음식 준비를 다 해놓고 설을 맞이하는 설레임만 가득한 밤이었다. 돈 벌러 나간 언니가 가져온 선물이 있었다. 큰오빠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밤을 새러 갔고, 얼른 돌아와서 자라는 아버지의 말은 정감이 있었다. 어린 홍희는 일찍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잘 수가 없었다. 설 전날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셔서, 어린 나이에 하얗게 샌 눈썹으로 학교는 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른 날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들 하는데, 설 전날 밤에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잠을 안 자려고 안감힘을 쓰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설날 새벽, 아직 새까맣게 어두운데 아버지는 홍희를 깨운다. 뜨신 물을 세수대야에 담아서 세수를 하라고 한다. 새 해가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엄마가 끓여 낸 떡국 한 상을 성주단지 앞에 갖다둔다. 그리고 또 한 상 차려 내어 부모님이 앉는다. 왠지 살짝 부끄럽지만, 아버지와 엄마에게 큰 절을 한다. 낯설다. 아버지는 덕담을 하고, 세배돈을 준다. 설날 아침, 아버지와 엄마는 참 좋다. 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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