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 ‘다티스트’展 참여한 정은주 작가
대구미술관 ‘다티스트’展 참여한 정은주 작가
  • 황인옥
  • 승인 2021.02.2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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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선…무한한 편안함 향한 30년 여정
아크릴판에 색 올린 후 겹치기
색칠한 나무 문질러 반입체 구현
생지에 물감 퍼뜨려 우연성 강조
다양한 화법으로 내면 묘사 시도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50여점
정은주작가
정은주 작가의 색면 작업 전반을 반추할 수 있는 전시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 정은주가 자신의 인식체계를 시각화하는 매개는 선(線)과 색(色)으로 구축된 사각 색면(色面)이다. 그녀가 인식한 세계는 색으로 켜켜이 쌓아올려 중첩된 사각 색면(色面)으로 실체화한다. 선과 색이 붓끝에서 협공을 펼쳐 다채로운 변주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사각의 색면이 위용을 갖추고 표정을 드러낸다. 색면은 그녀의 들숨과 날숨이 만나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실체적 세상이자, 회화에 대한 근원을 따라가는 여정에서 만난 진리다.

정은주의 색면 작업 전반을 반추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구미술관 기획전 ‘다티스트(DArtist)’ 시리즈에 걸렸다. 대구미술관이 지역미술 활성화를 위해 대구·경북 활동 작가 중 만 40세 이상으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를 지원하는 ‘다티스트(DArtist)’ 시리즈에 차규선 작가와 함께 선정되어 전시를 시작했다. 전시에는 작가의 초기작인 반입체 색면부터 회화로 회귀한 근작까지 작가의 색면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작품 50여점이 걸렸다.

작가는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내면세계를 색과 선을 매개로 실체적 사건으로 시각화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세계를 추상회화로 시각적으로 드러내는데 쏟은 시간이 어언 30여년이다. 돌이켜보면 작가의 색면추상은 도전과 극복의 대서사였다. 회화에서부터 아크릴판, 그리고 나무판으로 표현한 반입체 추상, 그리고 다시금 캔버스로 회귀한 회화 작업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변화 과정을 지나왔다.

색면작업의 출발점은 독일 유학 말미로 거슬러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연 풍경을 소재로 한 반 추상 회화에 집중했지만 대학원 졸업 무렵 작업환경이 변하면서 작업도 변화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졸업과 함께 연구실의 넓은 작업실이 아닌 상대적으로 좁은 집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서 공간적인 제약 앞에 맞닥뜨렸다. 그러면서 재료에 대한 변화가 모색되었고, 이때 캔버스 대신 아크릴판에 붓의 결을 살린 물감을 분사하고 분사된 아크릴판 3~5개를 겹치는 작업을 시작했다.

“겹쳐진 아크릴판과 판 사이의 간격에서 올라오는 색채의 변주는 겹침이 주는 미학의 절정이었고, 투명한 아크릴판이라는 재료가 주는 스펙터클함은 새로운 열정을 일깨웠어요.”

귀국 후 색면 작업이 본격화됐다. 반추상 풍경에서 색면추상으로 작업의 근간이 변화했고, 재료와 작업 방식도 변주를 시작했다. 투명아크릴판이 나무판으로 대체되었고, 붓 대신 스프레이로 뿌리고 판을 겹치지 않고 나열하는 식으로 작업 방식도 변화했다.

“나무조형작업은 색과 면의 크기와 두께의 차이에서 오는 자장관계를, 그리고 45도로 깍인 가장자리의 변화에서 작업의 특징을 잡았어요.”

2011년 봉산문화회관 개인전에서 나무로 구축한 색면 작업은 정점을 찍었다. 작품명 '테트리스'다. 이 작품은 디지털 게임 이미지인 테트리스를 아날로그 정육면체로 형상화하고, 그 조각들을 결합해 입체적인 공간감을 확보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테트리스 작업에서 선으로 구축된 면, 면과 면의 겹침과 그 속에서 드러난 수용 등의 작가 특유의 조형어법들이 본격화됐다.

회화로의 회귀 시점은 5~6년 전이다. 나무를 기반으로 하는 반입체 색면 작업을 한지 15년 정도 됐을 때였다. 나무에서 캔버스, 분사하는 방식에서 붓 작업으로 회귀했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갈망은 나무 작업이 주는 고단함과 작업과정에서 오는 심적인 요동 때문이었다. 밑칠과 사포질을 열 번 이상 가해야 하고, 본 색도 족히 스무 번 이상을 올려야 하는 고된 육체노동에 발목이 잡혔다.

“‘색을 선택하고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정신적인 작업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육체노동이었어요. 지난하고 힘든 노동의 시간들, 그리고 색면의 심도를 위해 같은 색이 수없이 반복해서 표현하는 과정에서 숨을 쉴 수이 답답함을 느꼈어요.”

회화로의 회귀는 색면 작업의 또 다른 진화였다. 회귀 이전보다 의식이 한뼘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제작한 반입체나 입체작업에서 여전히 가슴이 뛰었지만, 시간과 품이 너무 많이 들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하는 이것이 예술이 맞나? 일을 하는 것인지 작업을 하는 것인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올라오며 상념의 바다에 던져졌고, 그러면서 다시금 회화에 조금씩 의식이 옮아갔다. 당시 작업실 한켠에 고이 모셔져 있던 조형작업 이전의 회화 작품들을 꺼내놓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그래 이거야!”하는 자각이 일었다. “예전 회화 작품을 보고 편안함을 느꼈어요. 그 속에서 잔잔히 숨 쉬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회화로 돌아서고 이전 회화작업의 자연 풍경에서 추구했던 주제의식을 버렸다. 주제없이 오직 작가 내면의 흐름을 시각화하는데 집중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숨’ 시리즈에 해당된다. 회화 작품인 ‘숨’ 시리즈에서 나무 작업에서 막혔던 숨이 비로소 뚫리는 느낌이었다.

회화 작업 역시 작업을 풀어감에 따라 변주가 시작되었다. ‘숨’ 시리즈는 ‘결’ 시리즈로 진화했다. 캔버스 천 대신 밑칠을 하지 않은 면천인 생지를 채택했다. 가공되지 않아 물감을 머금고 번지는 우연성을 배재할 수 없는 생지의 변화무쌍함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실 그 우연성이 그녀를 이끌었다.

“생지는 인위적으로 색을 올려도 흘러내리거나 번지는 효과가 우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죠.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생지도 살아있는 생명처럼 색을 칠하면 물감을 머금었어요. 그 모습에서 살아있는 생명력을 보았어요.”

색은 인류공통 언어다. 각각의 색에는 보편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작가는 색이 가지는 보편성에 자신의 감성을 대변하는 개별성을 아우르며 색을 구사한다. 물감은 아크릴 물감의 순수성만 고집한다. 색 구성 역시 작가의 의지보다 본능에 따른다. 그녀가 추구하는 그림의 지향점에 ‘이성’ 이전의 ‘순수’가 있다. 그 끝에 ‘편안함’ 또한 존재한다.

“내가 긋는 선들이, 내가 취하는 색들이 저의 작업입니다. 제 작업은 완성된 이미지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풀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이죠.”

색과 선이 만나 면이라는 공간감으로 확장되지만, 작가 작업의 가장 큰 줄기는 ‘선을 어떻게 화면에 풀어내느냐’의 문제다. 그녀는 선에서 편안함을 추구한다. 편안함은 재료와 작업방식의 변화 중에도 놓치지 않는 가치다. 색을 매끈하게 처리하지 않는 것 또한 편안함을 위한 기제에 해당된다. “저는 선을 통해 무한한 편안함을 보고 싶어요.”

15년간 나무조형 작업을 하면서 정은주라는 작가를 각인시키고 육체적 한계에 대한 보상심리로 회화로 회귀했지만 고뇌가 없지는 않았다. “회화로 정은주라는 작가를 다시 각인시키려면 15년은 걸린다”는 동료 작가의 조언처럼 잘 닦아놓은 길에서 이탈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이 어디 쉬울까?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보다 도전하고 극복하는 삶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대신 “15년을 단축해 보리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그녀의 작업 집중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저는 외부보다 저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이 패턴화되어 있어요. 집중도가 높기 때문에 작업속도도 훨씬 빠를 것이기에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어요. 저는 계속해서 도전하며 진화해가는 작가로 살고 싶습니다.”

30년을 작업한 중견작가지만 그녀는 항상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고 고백했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길잡이를 찾아 주위를 돌아보기 보다 내 자신을 믿고 집중해 갈 것”이라도 했다. “주위를 둘러보기보다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면서 도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작업, 그 작업들이 저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전시는 대구미술관 3전시실과 선큰가든 그리고 2전시실 일부에서 5월 23일까지. 053-803-7900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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