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빗발치는 전투 끝내고…주먹밥 한 입, 눈물에 젖다
총알 빗발치는 전투 끝내고…주먹밥 한 입, 눈물에 젖다
  • 전상우
  • 승인 2021.03.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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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5)정성과 인고의 달구벌 음식맛
6·25전쟁이 만든 음식 주먹밥·망개떡
전장 나가는 자식들에 한덩이씩 나눠
파발 나선 사람들은 비상식량 누룽지
죽은 인민군 미숫가루자루 훔쳐먹기도
독립군들은 하루에 감자 2알로 연명
조용한 전장서 꺼내 먹으면 ‘인고의 진미’
대구음식맛
대구의 음식맛은 정성과 인고. 그림 이대영

최근 한 약품광고에 “이 음식이 왜 이렇게 맛이 있는지요?”라고 탤런트 최불암씨가 옆에 있던 남자친구에게 묻자 “(웃음을 보내면서 능청스럽게도) 정성 맛?”이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성분이 “인사들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잽싼 여성분이 “인사돌 하자고요?” 라고 유머를 던지자 모두가 웃는 광경이 전개되었다.

음식에 ‘손 맛’ 혹은 ‘정성의 맛’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6·25전쟁 이후,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는 건물조차도 없었다. 1~2학년에겐 말뚝을 박고 새끼줄에다가 바람막이 거적이나 보드복스 조각을 둘러친 가건물이 전부였다. 엄동설한이라고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솔방울 난로에다가 등·하교 길에 주워온 썩은 나무와 솔방울로 보온을 했다. 점심조차 먹지 않고 오후 수업을 마치고 5~8km를 달려서 집에 오면 기진맥진 상태였다. 그때 안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놓은 놋쇠밥그릇을 보자마자 i)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서러움을 달래고자 손부터 따뜻하게 녹였다. ii) 콧물 묻은 소매로 밥뚜껑을 열고 보면 “야, 이놈 고생했지?”고 하는 듯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iii) 로마황제도 “시장이 반찬(cibi condimentum esse famem)”이라고 했듯이 꿀맛으로 밑바닥까지 다 긁어먹고 나면, iv) 이불에 넣었던 발도 서서히 녹아내리고, 따사한 밥이 배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따사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 나게 맛있는 음식, 이게 바로 어머니의 정성 맛이었다.

외형상 정성을 표시하는 방안으로는 서양음식은 가장 먼저 눈으로 먹도록 하기위해서 음식 위에다가 장식(Ganish)을 한다. 이를 드레싱(dressing) 혹은 토핑(topp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음식은 (정성에 감동하여) 눈물로 먹도록 하기위해 ‘고명’을 얹는다. 따라서 고명은 정성과 멋(美學)을 더한다. 지방마다 다른 이름으로 ‘웃기’, ‘꾸미’ 혹은 ‘가니쉬(Garnish)’라고도 한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답게, 코로 냄새를 맡아도 고소하며, 오각을 통해서 먼저 맛을 보도록 한다. 가문이나 지방에 따라 오방색으로 벽사, 축복, 기원, 축도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음식철학을 덧붙인다.

아무런 표식도 없이 정성과 감사를 표시하는 방안도 많았다. 같은 보리밥 속에 쌀밥을 넣거나 쌀밥 속에 삶은 계란을 남모르게 넣어준다. 같은 도시락을 주면서 선호하는 반찬을 넣어주기도 한다. 맛있는 밥과 반찬을 마련하지 못함에 우리 어머니는 사랑의 메모쪽지를 넣곤 했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을 보고, “나는 왜 어머니가 없는가?”라는 서러움을 느낄 친구가 없을까 늘 주변을 살폈다. 조손가정인 옆 친구는 이를 보고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 젖은 밥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성경 시편에 “그들을 눈물의 빵으로 양육하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나이다.”라는 구절처럼 입으로 느끼는 맛이 아니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음식 맛이다. 음식을 통해서 인생의 맛을 느낀다는 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할 행운의 기회가 된다. 이런 음식 맛은 자녀들의 인생을 숙성시키고, 품위라는 멋을 더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음식은 3대까지 내려간다고 가문의 영예를 걸고 종가전통음식을 지켜왔다.

1829년 독일의 문호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소설 중 '하프악사의 노래'에서 "눈물로 얼룩진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 근심에 싸여 수많은 밤을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울며 지새본 적이 없는 사람은... "라고 소회한 구절이 나온다. 삶은 '눈물 젖은 빵' 맛에 숙성되고 의미를 찾는다.

시골서당에서 훈장님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울 때 사내남(男)자를 배웠다. 제자원리를 설명하시는데 “밭(田)에 쟁기질하는 모습(力)을 본떠 상형한 글자”라고 했다. 그러나 사내남자의 진정한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2001년 10월 어느 날 부인사, 구순의 옛 속세 성씨가 노(盧)씨인 주지 여승을 만나 대화를 하던 가운데 “사내남자는 10명(十)의 식구(口)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力)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가에선 해석한다고 말씀했다.

1998년 6월 18일 IMF외환외기 상황에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Bill Gates) 사장이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했다. 김 대통령은 “우리나라에도 사장님과 같은 기업가 1명만 있다면 30만 명 이상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자의 능력을 새삼 생각하게 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기 입 하나도 못 먹고 살겠다고 하는데, 이런 말을하며 사내남자의 뜻을 해명한다면 ‘꼰대’ 소리를 들을 것이다.

◇ 인고(忍苦)의 대구 음식 맛

2020년 11월 29일, 대구 수성구 욱수동 시지노인전문병원 앞 길섶 언덕에 있는 6세기경 유적인 반지하식 신라가마터(新羅陶窯)를 답사했다. 그곳은 앞산 골짜기(욱수골)의 흙(胎土)과 땔감에다가 망덕거량(旭水川)의 물을 사용해 토기(土器)를 빚어 달구벌(대구) 주변에 공급한 곳이다.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가운데 팽이모양의 그릇이 있는데 지역고고학자들은 갯벌과 같은 연한 지반에 박아서 사용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당시 민족음식(갓김치)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팽이형 토기(角形土器)를 땅에다가 묻어서 겨울김장은 물론 연중 숙성된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야생 갓나물(芥菜)을 김치로 담았다. 우리들이 김치하면 배추김치로 생각하나 병자호란 이후에 중국 ‘빠이차이(白寀)’가 도입되어 ‘배차’ 혹은 ‘배추’등의 이름으로 재배되어 배추김치가 주종이 되었다. 신라 갓나물 김치 때에도 “김치요. 5번은 푹~ 죽어야 제 맛을 내지요.”는 말을 대구사람들은 입에 달고 살았다. 제 맛내는 ‘오사숙성(五死熟成)’이란 : i) 밭에서 갓나물의 모가지가 잘리는 참수사(斬首死), ii) 칼로 갓나물 포기 속을 가르는 개복사(開腹死), iii) 소금, 고춧가루, 생강, 새우젓, 계피 등 온갖 맵고 짠 양념을 다 뱃속에 집어넣는 포복사(飽腹死), iv) 팽이토기에다가 빈틈없이 꼭꼭 밟아서 집어넣어 질식시키는 기절사(氣絶死), v) 마지막 음식으로 유산균 범벅인 김치조각이 목구멍부터 향미를 풍기면서 넘어가는 종천사(終天死)를 당해야 제대로 김치 맛을 낸다. 여기서 오사숙성이란 인고의 맛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8일 대전으로 수도이전을 감행했고, 다시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경북도청을 임시정부청사로 하여 1개월간 대구로 수도이전했다가 곧바로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1천 23일간 임시수도로 있었을 때, 북한 인민군을 막아내기 위해 포항-영천-대구(왜관) 낙동강방어선을 마지노선으로 하고 사활을 걸었다. 1950년 대구인구는 8만 9천 667가구에 26만 9천명이었으나 10배 가량의 피난민이 몰려와 콩나물시루처럼 복작거렸고, 외국인 종군기자들의 눈에는 전쟁 폐허의 인간쓰레기장(man-trash field of war’s ruins)이었다.

가옥이란 주한미군부대 피엑스(PX, USFK)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이나 탄피포장 골판지 조각으로 토끼집처럼 다닥다닥 붙여 임시천막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수단이 좋은 사람들은 미군부대 음식쓰레기통에서 나온 잔반음식에다가 물을 더 타서 끓인 꿀꿀이 죽, 잔반통에서 이빨자국이 있는 소시지나 고기조각을 별도로 모아서 부대찌개를 만들어 팔았다. 부대찌개는 최고급음식이었다. 꿀꿀이죽 그것도 돈이 있어야 사먹을 수 있었다. 죽은 군인들의 소가죽신 워커까지도 배고픔을 달래고자 허물하게 푹~ 삶아서 먹었다. 그것도 쇠고기라고 '워커 쇠고기(walker beef)'라고 했다. 대구 칠성시장에서 별미로 팔았고, 워커쇠고기 안주로 소주 한잔을 마셨다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 1920년 '황금광시대(The Golden Rush)' 영화에 찰리 채플린이 자기 신발을 삶아서 먹는 채플린의 구두 스테이크(Chaplin's shoes stakes)가 나온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자기 구두 먹는다(eating his shoes).'는 표현이 생겨났다.

6·25전쟁이 만든 대구의 음식으로는 무엇보다도 주먹보리밥과 망개떡이 있다. 일제식민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는 일본관동군은 넉넉한 병참보급으로 전쟁을 치룰 수 있었으나 독립군은 비상식량이라고는 삶은 자갈감자 한 주먹을 주었고, 북풍한설에도 낙엽을 이불삼아 추위를 이겼다. 하루에 감자 2알로 연명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6·25전쟁 통에서도 피난민들은 끼니와 전쟁을 했다. 한 입 줄이고자 학도의용군으로 전장에 나가는 어린 자식들에게 소금물에다가 담궜다가 건진 보리쌀주먹밥을 장병환송식이라고 한 덩이씩 나눠주었던 게 고작이다.

호국도시 대구에서는 임진왜란 때 동화사 승병과 의병들이 전투비상식량(field ration)으로 먹었던 특식이 있었다. 일명 팔공산 신령이 내려준 선유량(仙遺糧) 망개떡이다. 호국충렬로 출정하는 장병에게 망개떡을 손에 쥐어주었다. 집에 남은 식구들에겐 끼니거리가 없어도, 이웃에 쌀을 빌려서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망개나무(土茯笭, Smilacis Rhizoma) 혹은 청미래덩굴 잎사귀로 싼 망개떡(土茯笭餠)을 만들었다. 군가를 부르면서 오열을 지어서 전장으로 가는 자식들에게 그 떡을 손에 쥐어주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라고 시작하는 ‘전우야 잘 자라’ 노래를 부르면서 망개떡을 받아 탄띠 속에 끼워 넣고 앞으로 나갔다. 심지어 부모님이 건너 준 망개떡도 다 못 먹고 전사한 학도의용병도 있었다.

한편, 북한인민군은 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ミスッカル) 자루를 마련해 오늘날 젊은이들이 대각선(X자모양)으로 가방을 매는 것처럼 따발총(Submachine Gun, PPSh-41) 탄띠와 같이 매었다. 시골에서 배는 고프고 먹을 건 없을 때 죽은 인민군의 미숫가루자루를 풀어서 훔쳐 먹었다. 얼마나 늘 배가 고팠으면, 시골 어릴 때에 천자문을 배우는 학동이 “하늘 천 따지 가마솥의 누룽지 박박 긁어서 한 입에 먹으면 맛있지요.”라는 노래를 골목에서도 불렸다. 망개떡을 만들 수 없었던 가정이 더 많았다. 그럴 땐 멀리 부고를 전달하거나 유서통(諭書筒)을 짊어지고 파발(擺撥)을 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상식량으로 누룽지를 긁어주었다. 배고플 때 마른 누룽지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이런 풍습을 알았던 우리의 어머니 혹은 누나들이 자기 밥을 몇 일간 먹지 않고 만들었던 누룽지를 긁어서 말렸다가 품안에서 꺼내 손에다가 쥐어주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끝내고 조용해지면 배고픔도 찾아왔고, 그제야 망개떡이나 누룽지를 품안에서 꺼내 먹자니 눈물의 소금 맛이 ‘인고의 진미’였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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