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겨울방학
  • 승인 2021.03.22 20: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순란 주부
홍희네 집 앞 큰 못이 얼 정도로 겨울이 추운 해가 있었다. 추위는 농부들에게 한 겨울을 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아무리 추위로 기세를 떨쳐도 농부들은 떨지 않았다. 산에서, 들에서 쟁여놓은 땔감이 그득했고, 지난 가을 거둬들인 수확이 곳간을 가득채우고 있어, 등 따시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이라 집에 있으면, 어른들로 가득 찬 방에서 겨나다시피 밖을 떠돈다. 동네 못이 꽝꽝 얼면 아이들이 썰매를 타러 나온다. 아버지나 오빠, 형이 만들어 준 썰매와 쇠지팡이를 들고 얼음 위를 쌩쌩 달리면 추워서 즐겁다. 큰 못을 크게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대각선으로 질러 가기도 한다. 누가 빨리 달리나 시합을 하기도 한다. 신나는 놀이에 여자애도 남자애도 구별이 없다. 아침부터 동네 못은 동네 놀이터가 된다.

해가 높이 뜨면 얼음이 녹을까봐 집으로 간다. 점심을 먹고, 군불 지핀 따뜻한 방에서 엎드리고, 방학 숙제를 하기도 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기도 한다. 숯불에 구운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읽는 책은 맛있다. 톰소오여의 모험도 읽고, 15소년 표류기도 읽고, UFO에 관한 책도 읽었다. 동네 못에서도 즐겁게 놀던 홍희는 세상이 너무 넓은 것 같아서 동네 밖으로 나가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동네 밖을 나갈 수 없었고, 부모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시장, 고모집, 대구에 사는 외갓집, 큰집이었다.

홍희가 갈 수 없는 곳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세상은 화려하고 다양했고 풍요로웠다. 프로그램들이 눈을 끌고 귀를 기울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짜고 회의를 하고 연출을 했을 것이다. 홍희가 사는 동네는 우주 속에서 띠끌만할 것이고, 새로운 것이라곤 크게 없는 작은 마을이다. 텔레비전 속 세상을 보면 홍희 마을이 하찮게 여겨질 때가 있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하는 신제품 '선전'을 보면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자신의 집에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특히 키가 작아 하얀 우유를 마시고 싶었다. 병에 든 하얀 우유를 새벽에 집앞에 배달하는 광고를 보면 그런 집에 살고도 싶었다. 홍희가 사는 동네에서는 우유를 구경할 수 도 없었다. 우유는 '부'의 상징이엇다. 그래서인가 홍희가 방학에 언니가 사는 대구에 가서 먹고 싶다고 말한 것이 우유였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는 크게 맛있지는 않았고, 먹고 나서 설사가 났다. 처음 먹어봐서 위가 부담스러웠나보다. 그 이후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먹을 기회도 없었다. 홍희의 위는 '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겨울 방학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초등학교 앞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방학에 하는 교회 프로그램에 오라고 광고 전단지를 주었다. 노래도 부르고, 예배도 하고, 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주고, 선물도 준다고 했다. 교회 찬송가는 아닌데 쉽게 따라 부를 수 잇는 노래는 흥겨웠다. 희망과 기쁨이 가사와 가락에 배어있어서 즐거웠다. 과자와 떡도 먹었고 사탕도 먹어서 좋았다. 선물은 학용품이었다. 텔레비전 영화나 책 속에서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갖다준다고 했다. 착한 아이가 자고 있을 때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와서 굴뚝으로 들어와, 아이가 놔 둔 양말 속에 놓고 간다고 했다. 홍희는 스스로가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고 산타할아버지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안 이후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성탄절 아침에 선물을 받지 못했다. 세상 곳곳을 누비며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 할아버지는 홍희가 사는 작은 마을에는 오지 않나보다. 분명히 홍희는 착하게 살았는데 왜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주지 않는 걸까. 홍희는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고 싶었고 산타 할아버지가 가는 곳에 살고 싶었다.

자신의 세계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겼으나, 더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보면서, 초라함과 소외감과 상대적 박탁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족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족하다가, 부러워하다가, 부러워하면 지는거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다가, 또 욕심내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그 시작이 겨울 방학이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