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벼농사는 한반도에서…‘쌀의 민족’ 이유 있었네
세계 최초 벼농사는 한반도에서…‘쌀의 민족’ 이유 있었네
  • 김종현
  • 승인 2021.03.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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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9) 한국은 숟가락 종주국
기존 학설을 뒤집다
벼농사, 5천년 전 인도서 시작
이후 한반도 전파됐다 믿은 학계
1994년 충북 옥산면 유적에서
1만6천년 전 볍씨 11톨 출토
이후 벼농사 기원 한국으로 규정
숟가락종주국
우리나라가 숟가락 종주국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림 이대영

모두가 한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만 아니다. 지난해 중국 우한(武漢)의 코로나19(COVID19)로 인해 지구촌은 팬데믹(Pandemic)이란 늪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선진국이 갈팡질팡하는데도 K-방역(Quarantine)을 과시했으며, 해외언론은 연일 한국방역의 우수성을 칭송했다. 그러나 우리만은 주요언론을 통해 “일본에 비해~”라는 겸손의 차원을 넘어 자기비하에 빠졌다. 이런 사실이 고고학적인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모두가 한국이 기원국(起源國)이라는데도 우리나라만은 중국이 기원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인 숙성김치는 신라갓김치에 기원하고 있음에도 한국 사람만이 중국의 오이저리기(孰菹)가 기원이라고 한다.

특히 대구는 갓김치의 본향임에도 김치박물관과 김치축제를 광주와 서울에서 탈취해도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한반도를 기원국으로 하고 있는 벼농사, 콩 및 숟가락(飯匙)이란 역사적 유물이 출토되었고 이 사실이 중국 역사기록 뿐만아니라 외국 고고학 교과서에까지 등재되어 있는데도 한국인만이 ‘우리 아니고 중국’이라고 아직도 사대도리(事大道理)를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1940년대 황국신민의 서약을 했던 후손답게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수출규제에 ‘무조건 일본에 사과하라’는 일본사대(日本事大)까지 챙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글을 만들어서 한반도에 가르쳐 주었다거나, 한글은 일본신대문자를 그대로 모방, 고대 한반도 남부는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등 일본역사왜곡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세계최초 벼농사는 한반도에서

벼는 6천500년 전에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배했다. 4천~5천년 전 인도 갠지스(Ganges) 강 유역, 북부 미얀마, 타이, 라오스 혹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에는 이후에 쿠릴해류( Kurile Current, 親潮海流)를 타고 이주해온 동남아인에 의해서 전파된 것으로 그동안 여겨왔다. 동남아인이주설(東南亞人移住說)에 따르면, 밭벼농사(dry-land cultivation)는 우리나라에서 BC 3천500년경, 일본은 BC 1천200년경에 전해졌다.

중국에서 벼 재배는 BC 5세기 혹은 BC 11세기 전후, 중국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남부확산경로(southern diffusion route)학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부인되었다. 대략 9천년 전 중국과 인도 야생 벼의 근접관계성이 컴퓨터 알고리즘 분자시계(molecular clock)기법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는 1990년 7월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의 탄화미(炭化米)가 BC 2천100년경으로 추정됐다. 1987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가와리) 신석기 토층에서 나온 12톨의 볍씨를 미국 베타연구소에서 방사성탄소연도측정(radiocarbon dating) 한 결과 5천년 전으로으로 나와 BC 2천300년경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1994년 충북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으로 1만3천~1만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볍씨 11톨이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2016년 국제고고학회에서 벼농사의 기원을 한국으로 규정했으며, 1만3천년 전까지 소급해 세계적 고고학교과서로 사용하는 ‘고고학 개론서(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도 한반도 기원을 못 박고 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의 긍지를 살려서 지난 1972년부터 한국은행 50원짜리 동전에 벼이삭을 도안해 논벼농사의 기원지(Origin of rice farming)가 한국임을 기념했다.

동양의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사상에서 벼농사는 거대한 변혁을 초래했다. 경제사회적 의미에서는 i) 먹거리 생산성의 제고, ii) 출산비율 폭증, iii) 고대국가 건설의 기반과 재정확충, iv) 의식주의 동반성장을 촉진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벼가 평균 1천8배 가량의 산출을 얻는다고 믿었기에 벼화(禾)를 1,008(千八)을 의미하는 벼화(禾)로 창작했다. 볍씨를 뿌려서 벼를 추수하고 찧어 쌀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손이 88번 가량 간다는 의미에서 88(八十八)로 쌀미(米)자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벼농사는 일반적으로 88배 정도 소출을 본다고 믿었기에, 오늘날 승수효과로 표시하면 생산창출효과를 (88)n으로 추산할 정도로 먹거리생산에 변혁을 초래했다.

식물의 생산을 통해서 경제적 소출을 계산했던 생각은 BC 600년경 관중(管仲)의 ‘관자(管子)’라는 책에서 시작했으며 특히 경제전쟁론과 화폐계량설의 원조가 되었다. ‘한해 농사는 곡식경작이 최고, 10년 농사는 수목재배, 100년 농사는 인간교육이다(一年之計莫, 如樹穀. 十年之計,莫如樹木. 終身之計,莫如樹人)’라는 표현에서 오늘날 계량경제학이 잉태되었다. 이 구절을 케인즈의 승수이론으로 풀이하면 곡식경작은 한해 1,008배, 수목재배(木=十八)는 (18)10 까지, 인간교육(人=八=∞)이 국가를 번창시키는 건 (∞)100까지도 가능하다고 봤다.

◇숟가락의 종주국은 한국

발달한 숟가락 문화
밥 떠먹기 위해 자연스레 개발
태양과 달 모양 본뜬 둥근 모습
우주만물 생성의 상징성 담아
BC 5천년전 숟가락 발견되기도

숟가락은 BC 16세기와 12세기에 있었던 중국 상나라의 탕츠(湯匙)가 기원이라고 믿어왔다. 중국의 숟가락(匙)은 ‘고기나 음식을 칼(비수)에 꽂아서 구워서 먹는(所以用匕取飯) 형상을 글자로 만들었다’는, 후한의 허신(許愼, AD 58~148)이 AD 120년경 저술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비롯된다. 진수(陳壽:AD 233∼297)의 저서 ‘삼국지(三國志)’에도 “(많은 숫자의 병장에 대해 놀라면서) 선주께서 밥을 먹다가 그만 숟가락을 놓쳤다(先主方食 失匕箸).”라는 기록이 있고, 양제선(楊齊宣)의 ‘진서음의(晉書音義)’에도 “북방사람들은 비수를 갖고 숟가락으로 사용하기에 비수(匕)를 숟가락(匙)이라(北方人名匕曰匙)고 했다.” 또한 AD 648년에 저술된 ‘진서(晉書)’에서는 “밥 한 그릇에다가 두 개 숟가락을 놓았다(一杯食 有兩匙).”는 표현이 있다.

서양에서 기원은 BC 1만7천년부터 BC 1만2천년까지 구석기후기 마들렌(Magdalenian)기(期)의 순록 뿔로 된 숟가락(Spoon engraved in reindeer antler, Magdalenian)이 발굴되었다. AD 4~5세기경의 혹센 보물(Hoxne hoard)에서 로마식 숟가락이, 중국은 기원전 5천년경 국자형 뼈 숟가락(骨湯匙) 출토, 일본에서는 떨어진 연꽃의 낱장을 디자인한 치리렌게(散蓮華, ちりれんげ)를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가 중국보다 앞섰기에 젓가락으로는 불가능한 낱알 밥을 떠먹기 위해서라도 밥숟가락(반시)을 만들어야 했다. 문헌기록상으로는 AD 314년 이전 낙랑 분묘의 숟가락, 고구려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 환인오녀산성(桓仁五女山城)에 숟가락과 젓가락, 웅기 굴포리 서포항 유적으로 뼈 피리와 뼈 숟가락, 북한 나선 유현동 초도유적에서도 뼈 숟가락(骨匙), 신라 6세기 후반 금관총(金冠塚)의 청동숟가락(靑銅匙), 백제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4)릉의 청동젓가락(靑銅箸)이 출토되었다. 숟가락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고려 중기로 보고, 1960년대 시골에서는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은 숟가락만으로도 식사를 했다.

서울대학교와 대학박물관은 서울 강동구 암사동(巖寺洞遺蹟)에 대해 1967년 연합 발굴을 시작한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차례나 추가 발굴을 했다. 그 가운데 제8호 거주지에서 흙으로 만들어 구은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이를 방사성연도측정(radiometric dating) 한 결과 제작연대가 BC 5천년까지 소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고고학적 유물로 고고학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숟가락의 종주국(宗主國)이 한반도로 굳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숟가락엔 우주만물 생성기운의 원천인 태양(음양태극)의 상징성(원형)을 담고 있다. 태양과 달의 둥근 모양을 본떠 만든 태극숟가락(太極匙)이다. 사실, 실용성에서 둥근모양이 되었다. 즉 피, 조조, 벼 등의 알곡음식을 어떤 방향에서든 떠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숭유문화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주역(周易)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원용해 태극숟가락과 팔괘젓가락(太極匙八掛箸)을 제작 사용했다.

최근 YTN사이언스에서, ‘중국에서 기원했던 숟가락이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라졌으나,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 유교숭상문화 때문’이라고 했다. 그 근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있는 “숟가락은 밥에 꽂고 젓가락은 바로 놓는다(揷匙正著).” 등의 정통예의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을 만들고자 했던 옹고집이라는 것이다.

영국인 피터 안토니 모트(Peter Anthony Motteux, 1663~1718)의 번역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에서 “여보, 반짝인다고 모두 황금은 아니예요. 모든 사람이 은제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고요(It’s not all gold that glitters and every man was not 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라는 구절이 있다.

1970년대 중국에서 공무원과 같은 안정직종을 철밥통(鐵飯碗), 보다 안정성이 적은 직종을 나무밥통(木飯碗), 임시직종을 유리밥통(琉璃飯碗) 등으로 직장을 구분한 적이 있었다. 중국 운남성여강(雲南省麗江)의 옥용설산박물관(玉龍雪山博物館)에는 ‘내일은 뭘 먹을까?’라는 숟가락 예술작품이 있다. 주제는 자연환경의 파괴로 숟가락이 점점 작아짐을 실감할 수 있게 목제작품으로 만들었다. 이젠 우리나라는 숟가락의 종주국답게 숟가락 작품도 창작되어야 한다.

어릴 때 시골에서 동네에 누군가 죽었다면 '밥숟가락 사요나라(さようなら), 부타노카꾸니(豚の角煮) 시마시다(終しました).'라는 일본말을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따라했다. 숟가락을 들다(시작했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다(무임승차하다), 패랭이에 숟가락 꽂고 산다(구걸하고 있다) 등으로 다양한 표현이 존재했다.

최근 우리나라는 숟가락의 종주국답게 2015년 금수저 혹은 흙수저라는 현실감각을 살려 '숟가락 계급론(spoon class theory)'을 창조했다. 즉 소득과 재산의 순위에서 상위 1%의 금 숟가락(gold spoon), 상위 3% 이내의 은 숟가락(silver spoon), 상위 10% 구리 숟가락(bronze spoon), 연소득 5만에서 10만 달러의 나무 숟가락(wooden spoon), 연소득 5만 달러 이내 플라스틱 숟가락(plastic spoon) 및 2만 달러 이하의 흙 숟가락(dirt spoon)로 구분하고 있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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