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신분·나이 초월한 우정, 흑백감성으로 빚다
영화 ‘자산어보’…신분·나이 초월한 우정, 흑백감성으로 빚다
  • 배수경
  • 승인 2021.04.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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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유배된 정약용의 형 약전
출셋길 오르고픈 청년어부 창대
지식 교류로 벗이 되는 과정 담아
역사적 사실·허구 적절히 버무려
배우들 섬세한 열연 몰입도 높여
무채색으로 그려낸 영상미 절정
 
바다가 궁금한 학자 정약전(설경구)와 바다를 떠나 출세하고 싶은 청년 창대(변요한)은 신분도 나이도 달랐지만 서로의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된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담백한 한 줄의 문장이 더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때로는 선명하고 화려한 컬러보다 무채색의 화면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도 있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자산어보’가 바로 그런 영화다.

첫 사극 천만관객 영화로 잘 알려진 ‘왕의 남자’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사도’, ‘동주’, ‘박열’에 이어 그의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에서도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다.

조선 순조 원년(1801년)에 벌어진 신유박해로 약 100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고 약 400여명이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때 정약용의 3형제 중 약종은 사형에 처해지고 약전(설경구)과 약용(류승룡)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생활 중 펴낸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의 제목이다.

동명의 영화는 ‘자산어보’ 서문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정약전은 그의 책 ‘자산어보’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흑산도 해중에는 어족이 극히 많으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적어 박물자(博物者)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내가 섬사람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일명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은 탓으로 식견이 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鳥魚)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細察)하고 침사(沈思)하여 그 성리(性理)를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序次)를 강구하여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지어 ‘자산어보’라고 하였다.”

이준익 감독은 이 서문에서 발견한 창대라는 이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 역사는 책의 저자인 정약전을 기억할 뿐이지만 사대부 가문의 그가 어류에 대한 책을 완성하기까지 창대나 섬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섬에서 맛본 싱싱한 해산물에 감동하고 처음 보는 바다생물에 호기심이 생긴 정약전이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청년 어부 창대의 도움을 구하지만 그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한다.

바다가 궁금한 학자와 바다를 떠나 출세하고 싶은 청년의 연대는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이것은 돕는 게 아니라 거래”라는 정약전의 설득으로 시작된다. 신분도 나이도 다른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의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된다.

흑산도 아낙 '가거댁'(이정은)

영화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첫 사극에 도전하는 설경구를 비롯해 변요한, 이정은 등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126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흘러간다. 특히 흑산도 아낙 ‘가거댁’ 이정은과 흑산도 관리 별장 조우진의 천연덕스럽고 감칠맛 나는 연기는 무겁고 지루해 질 수 있는 영화에 중간중간 웃음을 선사한다. 동방우, 정진영, 류승룡, 김의성, 방은진, 최원영 등 우정출연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다’는 정약전과 달리 창대는 어느 순간부터 정약용이 생각하는 ‘목민심서’의 길을 걷고자 한다. 창대가 정약전과 결별하고 육지로 떠난 이후의 이야기는 좀 뻔하게 전개된다. 그는 꿈꾸던 세상과 다른 현실에 분노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는 민초들의 삶은 애잔하다. 영화 중간 중간 삽입된 정약용의 한시와 어물장수 문순득의 표류경험기를 바탕으로 정약전이 쓴 책 ‘표해시말’의 탄생 비화 등도 흥미롭다. 이렇게 영화는 역사적인 사실과 상상력을 오간다.

잘 그려진 수묵화를 펼쳐놓은 듯한 투박한 질감의 흑백화면은 인물의 눈빛과 몸짓, 목소리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배수경 기자 micba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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