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아우르는 시선이 낳은 그로테스크한 초현실
동서양 아우르는 시선이 낳은 그로테스크한 초현실
  • 황인옥
  • 승인 2021.04.18 21: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유진 국내 첫 개인전…우손갤러리
독일 유학 중 정체성 찾는 계기 마련
양국 정신세계·회화법 등 비교 습득
장지·목탄 동양적 재료 자유자재 활용
서양화 기반으로 하되 선·여백 등 차용
작가의 낯선 시선, 미지의 세계로 안내
이유진작-BlaueKomposition
이유진 작 ‘Blaue Komposition’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작가 이유진이 모국을 떠나 독일 유학생 신분이 되었을 때, 꿈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환희 못지않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엄습했던 것은, 당연하지 않은 순간에 놓여진 때문이었다. 현지인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독일이라는 새로운 문화와 직면해야 하는 정신적인 충격 앞에서 독일유학이라는 꿈을 향한 여정에 마냥 들떠 있을 수는 없었다.

세종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다 정형화된 교육시스템에 답답함을 느껴 중퇴하고 유학을 위해 독일로 떠났을 때, 그녀의 신분은 현지인에서 경계인으로 급변했다. 독일에서 미술적인 역량을 인정받으며 자신만의 예술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고, 먼저 독일 사회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 지상최대 과제였다. 

결과론적으로 그녀의 독일 정착기는 성공적이다. 그녀에게서 경계인이 빠질 수 있는 ‘제한적인 시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확장된 시각의 소유자라는 단초들이 화면 요소요소에서 묻어난다. 그녀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독일이라는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가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유진의 작품 세계는 그녀의 현재 신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과 독일의 중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그녀의 신분과, 동서양 양단의 화풍을 아우르는 그녀의 작품 세계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동서양을 대립과 갈등관계가 아닌 보완·확장의 관계로 인지하는 태도가 삶이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동서양의 화합은 경계인이 겪을 수 있는 정체성 혼돈이나 정신적인 고립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화합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녀 역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그녀의 뇌리에 하나의 개념이 스쳤다. '정체성'이었다. 독일 유학 초기, 독일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데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사실 “그 나이 되도록 정체성 조차 확립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국내 생활 중에 정체성을 요구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진지하게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려는 시도 또한 없었다.

하지만 막상 독일 사회의 일원이 되자 독일사회는 그녀의 뿌리에 관심을 가졌다. 독일사회에서 내공있는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작가는 독일인과 자신과의 차이부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독일에 있지만 나는 한국인이었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다.”

이유진의 정체성 찾기는 그림에도 묻어난다. 동양화적인 물성이나 표현기법들이 화면 전반에서 드러난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동양의 재료인 장지다. 그녀는 서양의 캔버스 대신 동양의 장지를 사용한다. 캔버스를 활용할 경우도 있지만 캔버스의 물성을 1차적으로 건드려 장지의 흡입력과 유사하도록 한 후에 그림을 그린다.

“독일에 있을 때 오히려 장지가 가진 물리적인 공간감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캔버스 대신 장지를 사용하게 됐다.”

동양화 재료인 먹의 효과도 적극 수용한다. 먹을 직접 사용하기보다 목탄을 사용해 먹의 흡수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목탄은 서양회화와 차별화되는 동양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특별한 물성으로 인식해 채택했다. “유연성이 내게는 가능성과 다양성을 제시해주는 요소로 인식하는데, 목탄에서 그 유연성을 목격했다.”

표현기법에서도 동양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서양화를 그리면서 동양의 선과 여백을 적극 수용한다.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서양화적인 접근법에서 벗어나 정신을 담는 그릇의 기능으로 동양화의 여백을 수용한다. 그녀의 화면에는 다양한 표정으로 드러나는 동양적인 선(線)들도 존재감을 발하는데, 이 선들의 변주는 우주적 공간으로 확장하는 매개다. “나는 여백이나 선을 이야기 구조를 명확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로 활용한다.”

작가는 한국과 독일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배척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로 상정하고, 두 세계의 독특한 형질을 모두 흡수하는데 예술적인 역량을 결집한다. 그녀의 확장적인 태도는 형상과 화면 구성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작업의 핵심 소재인 자연과 인간의 형상을 그로테스크한 표현법으로 처리하거나 현실과 초현실을 동시에 수렴하는 태도,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능인 사건들을 중첩하는 특유의 형식 등이 대표적이다. 소재와 형식, 표현법 등의 독특성으로 그녀의 화면은 한 편의 시(詩)처럼 담백하고 오묘하다. 동서양을 교통하는 그녀의 관점이 현실과 초현실을 한 화면에 동시에 수용하는 확장성으로 이어진 결과다.

그녀는 “평범을 거부하는 형상, 신화를 떠올리는 독특한 서사구조 등은 경계 너머의 세계인 ‘미지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여는 일등공신들”이라고 밝혔다. “불안하고 모호한 경계에 내 삶이 위치해 있다. 경계에 선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공적인 맥락에서도 의식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동서양의 접목이 너무 가볍거나 무거우면 부자연스러움을 흐를 공산이 크다. 이는 곧 두 세계 모두로부터의 외면을 의미한다. 각각의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두 세계 모두로부터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완성도를 구축해 내야 한다. 이때 필요한 덕목이 양단을 아우르는 역량이다. 이유진은 이질적인 두 세계를 ‘평등’의 가치로 아우르는데 탁월성을 보여준다. 어느 한 세계에 치우치기 보다 양단의 장점들을 교통시키며 종국에는 화합으로 이끌어낸다.

동양의 우주관과 서양 회화의 방법론을 하나의 세계로 연결하는 그녀의 태드는 다분히 지적이다. 내면과 외면, 유(有)와 무(無), 정신과 물질, 현실과 이상이라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철학적 정수들과 흑과 백, 선과 면의 대비 등 동서양이 가진 조형어법들을 한 화면에서 이지적으로 연결해낸다. 그녀가 독일 사회에 정착하며 경계인으로 살지 않았다면 거둘 수 없는 결실이다.

“경계에 서면 다른 이면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보여진다. 내가 독일에서 위치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선물이었다.”

작가가 지향했던 ‘동서양의 균형’이 처음부터 원만하게 완수된 것은 아니었다. 균형감각은 그녀가 독일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혼돈으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작가의 내면은 ‘제로 상태’였다. 독일 현지인들과 작가는 동서양의 차이만큼 달랐고, 그럴수록 자신이 가진 유·무형의 자산들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해졌다. 이른바 정체성 찾기였다. “정체성을 찾는 것에서부터 내 것을 쌓아갔던 것 같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불안했지만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국에서 강요받았던 고정관념들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편견없는 순수를 만끽할 수 있었다. “독일에 대한 공부가 깊어질수록 한국과 독일, 동양과 서양 사이의 균형 감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독일생활 어언 20년. 독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서의 영역을 확장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경계인이다. “외롭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는 “No problem(문제없음)”이라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경계를 새로운 세계를 여는 개방의 수호자로 인식한 작가 특유의 인식의 결과다.

그녀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은 ‘인식’이다. 인식은 작업의 출발선이다. 인식 후에 화면의 구성이 시작된다. 인식은 독일 유학 초기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됐고, 이후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나 회화의 표현법을 비교하고 습득하는 것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다. 그녀의 예술적 과제는 “인식의 결과를 한 화면에 어떻게 밀도 있게 표현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식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주장하는 외골수는 아니었다. 자신의 인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두 세계 모두를 대조나 대비를 통해 화면 속에 열어둔다. 그렇더라도 감상자에게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한국 고유의 미적 감수성과 서양회화의 자유분방한 표현법으로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고자 노력하지만 해석은 감상자의 몫이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뮌헨 아트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수학하고, 군터 펄그의 지도 아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에서 활동 중인 이유진의 국내 첫 개인전인 우손갤러리 전시에는 근작을 중심으로 페인팅 16점, 드로잉 19점, 판화 8점, 조각 5점의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우손갤러리 전시는 6월 11일까지며, 오는 5월에 아트바젤 홍콩의 인사이트 섹션에서 솔로 스탠드로 그녀의 작품이 소개된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