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의 메카 대구, 그 배경엔 역사적 아픔 있었다
치킨의 메카 대구, 그 배경엔 역사적 아픔 있었다
  • 김종현
  • 승인 2021.04.2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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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13) 볶음과 닭튀김의 기원을 찾아
음식과 문화의 연관성
칼질하던 전쟁땐 가축도살 폭증
돼지머리 걸듯 형벌도 효수형 성행
화약을 사용한 전쟁 후 불질 상승
시신 태운 숯불에 고기 구워먹어
 
치킨요리
치킨요리의 본향인 대구. 그림 이대영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周, BC 1,046~ BC 256) 팔진미(八珍味) 가운데 오늘날 ‘프라이드치킨(fried chicken)과 같은 튀김음식은 ‘통돼지 기름튀김’ 요리로 파오툰(paot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요리방법으로 ‘기름 튀김 닭(paoji)’ 요리를 해먹었으나 비웃음을 받을 정도로 시답잖게 생각했던 음식이라서 기록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형벌 가운데 사람까지도 기름에 튀기고 숯불에 구워 죽이는 포락지형을 만들었다. BC 1천 46년 애첩(왕비)이었던 달기도 포락시켰다. 그녀는 “미친 놈(狂蟲)” 의미의 조소(嘲笑)를 지으면서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닭고기를 튀겨먹었던 기록이 있다. 신라 AD 683(신문왕3)년 춘3월 귀족의 결혼예물에 된장, 기름, 꿀, 포, 식초 등의 음식식재료가 있는 것을 봐서 귀족에 한정해서 ‘튀김 닭)’음식을 해먹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신라포계와 중국포계는 요리방법이 판이하다. 중국은 기름을 발라서 알고기를 그대로 구웠다. 신라는 밀가루 등의 반죽으로 고기에 옷을 입혀서 튀김으로써 많은 양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했다. 오늘날 중국의 ‘지즈파오(jizipao)’ 혹은 ‘요우린지(油淋鷄)’는 중국 전통포계에서 기름튀김과 신라포계의 ‘튀김 옷 입히기(粉包)’가 가미된 것이다.

고려 이후에 우리나라는 적은 식량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이라도 한 모금씩 나눠먹고자 국을 끓여먹기를 좋아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탕평정책을 하면서 음식까지도 탕평채(蕩平菜) 혹은 탕평탕(蕩平湯)을 만들어 먹었다. 우리나라의 형벌에도 정도전은 조선건국프로젝트를 설계하면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란 법률서에서 고려의 관리의 부패참상을 보고 관리의 독직죄(瀆職罪)에 한해 “끓여 죽이는 팽형(烹刑)”을 선택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팽형을 그대로 계수(繼受)했다. 음식문화는 시대상황을 대변하기에 음식요리에 그치지 않고 죄인의 처벌기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시대에도 닭튀김을 요리해 먹었다는 기록을 우리가 읽지 않았다고 해서 신라시대부터 해먹었던 요리비결을 몰랐을 리 없다.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가문전통음식으로 전승차원에서 해먹었다. 조선시대에는 거칠고 소박한 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고자 했던 오늘날 식이요법(食餌療法, dietetic therapy)인 식치(食治)가 궁중음식에도 파고들었다. 물론 백성들에게도 양반가에도 유행했다. 특히 국왕의 식치는 유별나서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튀김 닭(fried chicken)이란 기름진 음식에 대한 식치요리책도 있었다.

세종, 문종, 세조의 3조에 걸쳐 전의감(典醫監) 의관(醫官)을 지냈던 전순의(全循義, 생몰연도미상)는 1459년 국왕의 식치(food therapy)를 위해 튀김 닭 요리법을 적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을 저술했다. 1487년 그의 저서 '식료찬요(食療纂要)'는 성종의 식치(食治)를 위해서 헌납되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 제시하고 있는 튀김 닭 요리법은 "i) 살찐 닭 1마리를 24~25 토막으로 자르고, ii) 솥에 기름을 붓고 달군 후에 고기를 넣어 빠르게 뒤집어, iii) 간장과 참기름을 밀가루에 섞어 고기에 입힌 뒤에, iv) 식초와 같은 양념을 겸해 잡수도록 내드림"으로 적혀있다.

◇조선포계와 외국요리 비교

오늘날 닭 요리(튀김)에 비교하면 i) 튀김가루로 옷을 입힌 후에 기름에 튀기는데 반해서 일단 기름에 익혀서 나중에 간장과 참기름으로 반죽한 밀가루 옷을 입히는 순서로, ii) 고단백 혹은 고지방을 방지하기 위해 바싹거릴 정도로 튀기지 않음에서 다르다. 현대식 중국요리에 비교하면 i) 요즘은 매운 맛을 내기 위해 고추 혹은 고추기름 등에 반죽해서 닭고기 요리를 하는데 비해 자극성이 적은 간장과 참기름을 사용, ii) 닭고기, 양념 및 밀가루 반죽에 버물려 요리한다는 점에서 ‘라조기(辣椒鷄)’요리와 차이가 난다. 또한 바싹거릴 정도로 튀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깐풍기(乾烹鷄)’와도 다르다. 당시는 튀긴다는 개념보다 “기름을 두르고 들들 볶는다”는 개념이었다. 당시 표현을 빌리면 “사람을 그렇게 들들 볶아도 감정이 상하지 않겠나?”라는 말이 유행했다. 식초를 소스(souce)로 했다는 점은 오늘날 영국의 ‘피시앤 칩스(Fish and Chips)’와 같다. 식초가 들어갔다는 점에선 오늘날 중국의 ‘탕수육(糖醋肉)’과도 닮아있다.

오늘날 일본사대주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은 튀김 닭(fried chicken)은 일본 덴푸라(天ぷら)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페디아(ja.wikipedia.org/wiki)에 따르면 나라시대(710~794)부터 헤이안시대(794~1192)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튀기는 요리법이 전래되었다. 이어 16세기(1573~1603) 필레테스(filetes)라는 포르투갈 요리가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되어 교토,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전파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일제식민지 시대에 많은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는 “개 잡아 동네 비끼고, 닭 잡아 식구 비낀다.”고 할 만큼 식량이 부족해 닭 한 마리만으로 동네잔치를 할 형편이었다. 따라서 튀김 닭은 꿈도 못 꿨다.

튀김 닭은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흑인노예무역을 하면서 스코틀랜드 노예주가 제공한 요리법에 따라 튀김 닭을 만든 게 최초 발명이었다. 물론 튀김요리는 BC 2천 400년 고대 이집트의 왕국 요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닭튀김은 스코틀랜드의 튀김 닭이 미국남부로 전파되어 오늘날 흑인들의 소울 푸드(soul food)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의 튀김 닭이 아주 바싹한 것(crisp)은 i) 감자전분 혹은 혼합전분(감자전분+소맥분) 사용과 ii) 두 번 이상 바싹거릴 때까지 튀기기 때문이다.

 

군사적 요충지 대구
과거엔 닭고기 90%가 군납용
군부대 집중된 대구서 소비↑
양계장·도계장 규모도 커져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등 유명

◇전국최초 그리고 최대통닭의 공급처

불경기일수록 맥주보다 소주가 잘 팔리듯이 한 시대를 유행했던 음식에는 관련된 각종문화가 톱니바퀴처럼 연관되어 있다. 과거 음식요리법이 형벌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처럼, 칼질하던 전쟁 때는 가축도살과 육식이 폭증했고, 도축한 머리를 가게에 내다걸듯이 형벌에서도 참수형에는 반드시 효수형(梟首刑)을 병행한다.

화학을 사용해서 전쟁한 이후에는 군인의 총질, 대장간 불질, 다비장례, 주막집의 불고기음식이 동반 상승했다. 단적인 사례로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유엔군화장장(문화재 제408호,2008.10.1.지정)에서는 화부(火夫)들이 정신없이 불질을 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시신을 태웠던 그 숯불에다가 통닭을 굽고 소주를 정신없이 마셨다.

외국사례로 네팔엔 조장전통(鳥葬傳統)이 최근까지 이어져왔다. 아무리 천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장의장(葬儀匠)은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다. 술에 정신을 잃고 난 뒤에 시신을 칼로 토막을 내어 독수리에게 모이로 줄 수 있었다. 어느 시대이든 인간이기에 넋을 잃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간백정이라고 했던 망나니(휘광이)들이 만취된 상태로 참수를 했고, 인간으로 영혼이 되돌아오기까지는 며칠간 심한 고통을 받았다.

오늘날 대구에서 치킨업체가 타지보다 유별나게 많은 이유로는 i) 1904년부터 달성(오늘날 달성공원)에서 일본군 14연대가 주둔하면서 청일전쟁에 승리했고, 승전기념으로 1905년에 달성공원 성역화작업을 했다. 일본군부대는 한일합방까지 전국의병들을 토벌해서 관덕정(觀德亭)에다가 참수 혹은 총살했기에 타지보다 더 많은 칼질과 불질을 대구에서 해대었다. ii) 1925년 이후엔 오늘날 대구명복공원 자리에 고산화장장을 설치해 일본군은 물론 일본인의 화장을 했다. 일본인 상대의 요리점은 물론이고 주막집에서도 불고기가 유행했다. 불질하는 사회에선 음식까지 불질이 연결되어 숯불구이 불고기가 많았다. iii) 해방이후에 한국전쟁이란 3년간 총질(불질)을 하는 바람에 화장건수도 폭증했다.

1980년대까지 고산화장장은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고산통닭집’이라고 불렸다. 농담을 진담으로 알고 “여보세요? 통닭집입니까?”라고 묻는 전화가 빈발했다. 만약 짓궂은 총각공무원들은 아가씨 전화가 왔다면 “예, 아가씨는 공짜로 잘 구워드리겠습니다. 여기는 고산통닭입니다.”라고 대답한다는 유머가 대구공무원 사이에 유행되었다.

여기에다가 군사적 요충지로 iv) 1920년 오늘날 캠프워커(Camp Walker) 자리에 일본군 경비행장과 격납고가 설치됐고, 1921년 오늘날 캠프 헨리(Camp Henry) 군사기지에 일본제국 육군식민지사령부가 설치되어 육군 소장 미나미 지로(1874~1955) 사령관이 지휘를 했다. 현재 캠프 조지(Camp George) 자리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대구헌병대본부까지 설치되었다. v)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전선의 최종보루로 1년간 사수를 하는 바람에, K2공군비행장(Air Port), 캠프워커 K37에어베이스(A3-Hel Pad, 2016년 이전)에다가 캠프 워커(Camp Walker), 캠프 헨리(Camp Henry) 및 캠프 조지(Camp George)에 주한미군이 주둔했고 아직도 군사작전을 하고 있다. 대구는 한반도의 중심이며 군사적 요충지로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군부대가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날도 닭고기의 소비처는 군부대와 학교급식에 40%, 최근 치킨산업에 40%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2010년 이전에는 학교급식도 없었다. 2019년 말 전국 치킨업소는 9천 475개. 이렇게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90% 가량이 군납이었다. 2000년 이전 군용식량의 부식품인 닭고기가 폭증했기에 양계장(養鷄場)과 도계장(屠鷄場)이 규모면에서도 전국에서 대구가 최대였다. vi) 군용 부식품 닭고기 공급에 따라 상품성은 떨어지지만 음식으로 먹음직한 닭 뒷고기(chicken by-meat)도 많이 나왔다. 닭 뒷고기로는 칠성시장의 닭 곱창, 평화시장의 닭똥집, 영선(방천)시장의 닭 발 등이 1990년대에 유명세를 올렸다. vii) 미군부대주변에서는 흑인들의 소울푸드였던 닭 날개를 중심으로 치킨시장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1970년 미국에 유학했던 젊은이들이 치킨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런 복합적인 여건으로 대구는 역사적으로 치킨의 본향이며, 명실상부한 치킨의 메카(Chicken’s Mecca)로 형성되어 왔다.

글·그림=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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